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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9 (목)

[전문기자의 窓] 씻김굿과 진혼곡이 필요한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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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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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놀이와 카운트다운은 없었다. 지난 연말인 31일 밤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제야(除夜) 음악회는 없는 것이 많았다. 우선 자정 직전에 연주회가 끝난 뒤 우면산 밤하늘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화려한 불꽃놀이가 사라졌다. 새해를 기다리면서 관객들이 다 함께 외치는 카운트다운도 빠졌다. 당초 야외 행사 대신에 실내 행사로 대체하려고 했지만, ‘제주항공 참사’ 이후 그마저 모두 취소했다.

제야 음악회의 시작을 알리는 첫 곡도 바뀌었다. 처음에는 요제프 슈트라우스의 경쾌한 폴카인 ‘걱정 없이(Ohne Sorgen)’를 연주할 예정이었다. 단원들이 “하하하하”라는 웃음소리를 내면서 연주하는 이 폴카는 빈 필하모닉의 신년 음악회에서도 즐겨 연주하는 곡이다. 하지만 이날만큼은 영국 작곡가 에드워드 엘가의 ‘님로드(Nimrod)’로 대체됐다. 본래 추모와는 무관한 기악곡이었지만 영국 특유의 품격을 느낄 수 있는 따스한 현악 선율 덕분에 2022년 퀸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장례식 등 지금은 추모곡으로 사랑받는다. 이날 제야 음악회에서도 연주를 시작하기 전에 관객들이 추모의 의미로 함께 묵념하는 시간을 가졌다. 마지막 앙코르 역시 같은 작곡가 엘가의 ‘현을 위한 세레나데’ 2악장으로 운을 맞췄다. 덕분에 제야 음악회는 무척 차분하면서도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전날 대학로 예술가의집에서 열린 더하우스콘서트의 송년 갈라 콘서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국악과 양악(洋樂) 등 10개 팀이 차례로 출연한 이날 음악회에서 국악 단체인 ‘서의철 가단’은 당초 흥겨운 서울 굿을 들려줄 예정이었다. 하지만 전날 참사 소식을 접한 뒤 처연한 진도 씻김굿으로 변경했다. “저승길이 길이라면 한 번 가면 못 오는 것….” 망자의 넋을 위로하고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노랫말에 적지 않은 관객들이 눈시울을 붉혔다. 소프라노 임선혜도 미리 준비했던 곡 대신에 ‘자비로운 예수(Pie Jesu)’ 등을 불렀다. 출연진과 장르는 달랐지만, 위기와 고난의 시기에 예술은 무얼 할 수 있는지 보여줬다는 점에서 이보다 뜻깊은 송년의 방법은 없는 듯했다.

국가 애도 기간이 선포된 직후 전국에서 많은 문화 행사와 공연들이 취소됐다. 그 결정 이면에 담긴 고민을 충분히 이해하고 존중한다. 다만 한 가지 의문은 남는다. 전통 음악의 씻김굿부터 서양 음악의 레퀴엠까지 망자(亡者)의 넋을 달래고 산 자를 위로하는 것이야말로 음악의 역할이자 임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레퀴엠은 진혼곡(鎭魂曲)으로 번역된다. 예상치 못했던 참사 앞에서 예술가들마저 침묵한다면 결과적으로 사회의 무기력함은 배가될 수밖에 없다. 문화 예술을 중단시키기보다는 장르와 곡명과 연주 방법을 바꿔서 제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북돋을 방법은 없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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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현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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