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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1 (목)

    이슈 미술의 세계

    천재적 앵글, 파격적 연출…시대의 아이콘을 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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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레

    사진 작가 아놀드 뉴먼이 1994년과 1993년 각각 찍은 당시 이스라엘 총리 이츠하크 라빈(왼쪽)과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해방기구 의장(오른쪽)의 초상사진. 일체의 배경을 배제하고 바로 얼굴 정면만 밀착해 육박하는 듯한 시선으로 찍는 크롭 기법을 구사한 작품이다.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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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은 적이 아니다.



    사람의 얼굴만이 부각된 두 거물 정치인의 초상사진이 내걸려 있다. 1993~94년 이스라엘 총리였던 이츠하크 라빈(1922~1995)과 당시 그의 맞수였던 야세르 아라파트(1929~2004) 팔레스타인해방기구 의장. 주변 배경은 물론 이마 부분까지 모두 배제된 사진 틀 속에 두 정치가의 주름진 얼굴만이 가득할 뿐이다. 그 안에는 종교와 정치, 이념은 없다. 알 듯 모를 듯 미소를 머금고 눈빛을 빛내는 그들의 주름진 얼굴. 오직 연령대와 얼굴의 형상만이 비슷하게 가늠되는 형제 같은 사람일 뿐이다.



    미국 사진 거장 아놀드 뉴먼(1918~2006)이 1994년과 1993년 각각 찍은 라빈과 아라파트의 초상사진은 연출의 파격을 통해 휴머니즘의 감동을 안겨주는 걸작이다. 1993년 ‘라이프’지가 오슬로 협정 평화회담에 참여한 두 지도자의 초상사진을 의뢰해 찍었다는 두 사진에서 작가는 배경과 풍모를 강조하는 기존 초상사진의 기본 명제를 버렸다. 배경을 지우고 바로 얼굴 정면만 밀착해 육박하는 듯한 시선으로 찍는 크롭 기법을 구사하면서 본질적인 인간성, 인간의 동질성을 웅변하는 사진을 만들었다. 라빈은 1995년 곧장 암살됐고, 아라파트는 10년 뒤 중동평화 협정의 안착을 보지 못한 채 숨졌다. 최근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대한 이스라엘의 무차별 공격으로 전쟁의 참화가 더욱 가중된 지금 시점에서 30여년 전 사진 속 얼굴은 더욱 애틋한 상념을 낳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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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3년 미국 국회의사당 난간에서 뉴먼이 찍은 존 피츠제럴드 케네디 전 대통령의 하원의원 시절 사진 세부. 벽과 난간 기둥 사이에서 날카로운 눈매로 무언가를 주시하고 있는 젊은 케네디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 Arnold Newman Properties/Getty 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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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먼의 말년기 대표작으로 꼽히는 이 초상사진들을 그의 다른 대표작들과 함께 볼 수 있는 전시회가 서울 삼청동 뮤지엄한미 삼청본관에서 열리고 있다. 현대 예술인과 명사들의 초상사진 영역에서 최고 거장으로 꼽히는 뉴먼의 작업 세계를 망라한 ‘시대의 아이콘: 아놀드 뉴먼과 매거진, 1938~2000’이다. 캐나다 온타리오 미술관의 국제 순회전의 하나로 기획된 이 전시는 전후 세계적인 예술가와 정치인들의 내면과 성격을 절묘한 연출로 표출해온 뉴먼의 초기 실험작, 잡지 의뢰작, 창의적 인물사진, 기업 의뢰작, 보도사진 등 200여점의 작품을 망라해 보여준다. ‘추상적 리얼리즘’ ‘환경초상’ ‘통합초상’이란 개념으로 대표되는 모더니스트 뉴먼의 천재적인 앵글 감각, 평면과 구성적 요소를 자유롭게 조합해 새로운 미학을 일궈낸 실험정신 등을 살펴보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미국 마이애미 미술대학에서 수학하고 필라델피아 백화점 사진관에서 조수로 일하며 실무를 익힌 그는, 1930년대 미국 대공황 시기 농업안정국의 기획으로 사회적 다큐멘터리 사진들을 찍은 워커 에번스, 에드워드 웨스턴 등에게서 강한 영향을 받아 모더니즘 요소인 평면에 사진의 현실적인 이미지들이 구성적으로 배치되는 이른바 ‘추상적 리얼리즘’의 세계를 초창기에 추구했다. 이런 작품 흐름은 1941년 뉴욕에서 버몬트 뉴홀 뉴욕현대미술관(MoMA) 큐레이터, 사진 거장 앨프리드 스티글리츠와의 만남을 통해 숙성되면서 ‘환경초상’으로 정립된다. 피사체가 되는 예술가, 정치 사회 명사들의 작업실이나 작품들의 평면, 주요 활동 공간 속에 그들을 하나의 구성 요소로 배치하면서 내면과 개성이 두루 표출되도록 하는 방법론을 개발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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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거장 앨프리드 스티글리츠와 회화 거장 조지아 오키프 부부를 1944년 미국 뉴욕에서 만나 찍은 뉴먼의 작품 세부. 특이하게도 두 예술가는 서로를 외면하고 각기 반대편으로 눈길을 주고 있다.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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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적인 사례가 역사상 가장 유명한 예술가 부부 중 하나인 사진 거장 앨프리드 스티글리츠와 회화 거장 조지아 오키프를 1944년 뉴욕에서 만나 찍은 작품이다. 특이하게도 두 예술가는 서로를 외면하고 각기 반대편으로 눈길을 주고 있어 첨예한 예술적 견해차와 개성의 대립을 단박에 실감하게 한다. 부부 사진인데도 대립각을 세우는 구도를 택한 도발적 파격과 이를 곧이 수용해 사진상 둘의 존재감을 독특하게 아로새긴 스티글리츠, 오키프의 끼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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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놀드 뉴먼이 1946년 뉴욕에서 찍은 러시아 작곡가 이고리 스트라빈스키의 초상. 거대한 음표 같은 그랜드 피아노를 중심에 두고 주인공인 피사체를 왼쪽 구석에 밀어넣은 파격적인 구성이 인물의 개성과 감수성을 더욱 강렬하게 증폭시키는 효과를 만들어낸다. © Arnold Newman Properties/Getty 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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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의 제전’으로 유명한 러시아 작곡 거장 이고리 스트라빈스키의 피아노 앞 초상은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대표작이다. 거대한 음표 같은 그랜드 피아노를 중심에 두고 주인공인 피사체를 왼쪽 구석에 밀어넣은 파격적인 구성이 인물의 개성과 감수성을 강렬하게 증폭시키는 효과를 만들어낸다. 이번 전시에서는 1946년 뉴욕에서 찍은 그의 초상사진 프린트와 별개로 따로 전시 영역을 마지막 부분에 만들어 수년간 작가가 공들여 그와 교분을 지속하면서 유명한 피아노 포즈를 만들기까지의 지난한 과정들을 숱하게 찍은 일상적인 필름컷 사진들을 통해 선보이고 있다.



    1942년 뉴욕에서 찍은 줄 쳐진 공간에 갇힌 듯한 예술가 마르셀 뒤샹의 초상사진과 1960년 미국 매사추세츠주 거처에서 멀리 뛰어가는 부인을 원경으로 삼고 찍은 거장 화가 에드워드 호퍼의 사진도 강렬한 감흥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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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놀드 뉴먼이 1942년 뉴욕에서 찍은 예술가 마르셀 뒤샹의 초상사진. © Arnold Newman Properties/Getty 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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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 미국 매사추세츠주 거처에서 뉴먼이 찍은 거장 화가 에드워드 호퍼의 사진. 그의 뒤로 멀리 조그맣게 보이는 이는 화가의 부인이다. © Arnold Newman Properties/Getty 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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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에서 또 하나 강조한 부분이 바로 라빈과 아라파트로 대표되는 정치인들의 사진인데, 1953년 미국 국회의사당 난간과 벽 사이에서 날카로운 눈매로 무언가를 주시하는 존 피츠제럴드 케네디 전 대통령의 하원의원 시절 사진 속 모습이 훗날 암살로 단명한 그의 삶을 암시하듯 다가오고 있다.



    출품작은 캐나다 온타리오 미술관 소장품들로, 초창기부터 말년까지 그의 작품세계와 함께한 패션잡지, 사진잡지 등의 작업 아카이브가 파블로 피카소와 앤디 워홀, 마사 그레이엄 등 유명 예술가 등의 초상사진들과 함께 나왔다. 특정 인물에 대한 집요하고 깊이 있는 이해, 정교하면서도 치밀한 연출로 저명인사들의 삶을 모더니스트의 앵글로 부각시키는 거장 뉴먼의 안목과 재능을 여실히 파악할 수 있다. 3월23일까지.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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