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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룩의 간을 빼먹는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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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가 지난달 25일 런던 총리 관저에서 국방비 인상 및 대외원조 삭감 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런던=로이터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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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소련 붕괴 직후 태어난 나는 냉전 시대 국제사회 분위기가 어땠는지 모른다. 적성국에 대한 공포와 적개심이 공동체의 제1 원칙이었다는 걸 읽고 듣긴 했으나 직접 겪지 않았으니 그 엄혹함을 실감한 적은 없다. 세계화와 문화적 관용, 인류 공통의 번영을 지향하는 '지구촌 사회'가 내가 배운 바람직한 세계였다.

그래서 지난달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의 발표를 봤을 땐 신냉전 초입 길의 풍경이 이런 건가 싶었다. 영국 국방비 지출을 2027년까지 국내총생산(GDP)의 2.5%까지 올리겠다는 것이었다. 그 재원은 영국의 대외원조 자금을 사용하겠다고 했다. 세계 최빈국의 기아·질병·범죄 해결에 투입하던 돈을 앞으로는 국방비에 쓰겠다는 의미다. 개발도상국 아이들의 음식과 학용품을 도로 빼앗아 자국군 무기를 만들겠다는 얘기를 스타머는 대단한 결심이라도 한 듯 비장한 얼굴을 하고 꺼냈다.

당연히 반발이 있었다. 스타머가 과거 개도국 국민을 대리하는 인권변호사였기 때문에 충격이 더 컸다. 정작 스타머 측은 억울해했다. 미국의 방위비 증액 압박이 거세고,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갈등 원흉' 러시아는 여전히 기세 등등하다. 유럽 극우진영은 "미국이 자국 우선주의를 이유로 국제개발처(USAID)를 폐지한 것 좀 배우라"며 선동하고, 영국 공공서비스 역시 이전 같지 않다. 자국민 복지 자금을 뺄 수는 없으니 결국 개도국 어린이 밥줄 끊고 무기를 사는 게 '필요악'이라고 스타머 측은 항변했다. 이런 합리화가 냉전의 얼굴이지 않나 싶다.

진짜 위태로운가. 2023년 영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약 4만9,000달러, 미국은 8만2,000달러였다. 반면 이들이 원조를 끊은 아프리카 국가는 1만 달러 넘는 곳이 거의 없다.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재화를 누리면서도 더 큰 풍요를 유지하기 위해 극단적 대립이 불가피하다는 논리는 평생 이해하고 싶지 않다. 미국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남자들이 가장 가난한 아이들을 상대로 싸우고 있다"고 질타했다.

그리고 한국.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가 나오지 않았지만 정치권은 슬슬 대선 모드다. 한국의 선거 분위기는 영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여권 대선 잠룡인 오세훈 서울시장은 '이제 성장이다' 책을 냈고,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열심히 '우클릭' 중이다. 엄혹한 대내외 환경 앞에 기후변화 대응, 부의 재분배, 노동자·여성·성소수자·이주민 권리 확대 같은 포용적 공약은 거의 금기시되는 듯 보인다. 지난 수년간 제기된 과도한 개발 및 불평등 관련 경고가 다 허언이었을까.

누적된 폐해는 어떻게든 터진다. 산적한 모순과 불합리를 외면한 채 '성장과 경쟁'에 매진하면 국가가 발전한다는 얘기는 의심스럽다. 타인의 고통을 방치하고 도달한 곳에 낙원이 있을 리 없다.

김현종 기자 bel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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