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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고운사와 염라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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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연합뉴스가 지난 2월 11일 취재한 경북 의성군 단촌면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 고운사의 가운루. 가운루는 지난 25일 의성 지역의 대형 산불로 전소됐다. 의성=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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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부터 누구나 죽으면 염라대왕 앞으로 가 심판을 받는다고 믿었다. 이승에서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저승 중에서도 극락(하늘나라)으로 갈지 지옥으로 떨어질지 나뉜다고 봤다. 염라대왕은 망자가 살면서 지은 죄를 낱낱이 비추는 거울인 업경대(業鏡臺)와 죄의 무게를 재는 저울인 업칭(業秤)으로 결정을 내린다. 그런데 마지막 판결 전 “고운사(孤雲寺)는 다녀왔느냐?”고 묻고, 가본 적이 있다고 하면 죄 하나는 면해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 염라대왕이 유독 고운사 인연을 물은 건 이곳이 지장보살의 영험이 해동에서 으뜸가는 성지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지장보살은 지옥에 빠진 모든 중생이 구제될 때까지 자신의 성불을 미룰 정도로 자비로운 분이다. 고운사엔 이런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염라대왕 등 지옥을 관장하는 열 명의 대왕(十大王)을 모신 명부전(冥府殿)이 있다. 다른 사찰에선 보기 힘들 정도로 위엄이 넘치고 정교한 십대왕 모습이 눈길을 끈다.

□ 경북 의성군 고운사는 681년 의상대사가 창건했다. 등운산(騰雲山) 자락에 터를 잡아, 높은 구름이란 뜻의 고운사였으나 통일신라시대 고운(孤雲) 최치원이 머물며 가운루(駕雲樓) 등을 지은 뒤 그의 이름을 따 한자를 바꿨다. 가운루는 계곡을 가로지른 바위 위에 나무 기둥을 세운 뒤 만든 높이 13m 폭 16m의 누각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찰 건축물 중 하나로 꼽혔다. ‘구름을 타는 누각’이란 뜻의 현판 글씨도 고려 공민왕이 세상을 뜬 노국공주를 그리워하며 쓴 친필로 알려졌다. 고운사엔 또 조선 왕실의 계보를 적은 어첩을 봉안하고 무병장수를 기원하기 위한 연수전(延壽殿)도 있었다.

□ 그 자체가 박물관인 천년고찰 고운사가 허망하게 사라졌다. 국가지정문화유산 보물로 지정된 가운루와 연수전을 비롯 전각 18채가 소실됐다. 절 입구에 있던 최치원문학관도 불에 타 무너졌다. 다행히 명부전은 화마를 피했다. 그러나 나중에 염라대왕이 “1,344년을 버텨온 고운사를 어찌 한순간에 잿더미로 만들었느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게 됐다. 사람들의 경솔함과 이기심에 금수강산까지 불지옥이 될 참이다.

지장보살과 염라대왕 등을 모신 고운사 명부전의 내부 모습. 사진 출처 블로그 '한송의 세상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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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일근 수석논설위원 ikpar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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