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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25 (목)

    죽은 니체는 말이 없다! [.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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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레

    초역 니체의 말 l 시라토리 하루히코 엮음, 박재현 옮김, 삼호미디어(2010)


    가수 김연자의 트로트 곡 ‘아모르 파티’(Amor fati)에 이어 지드래곤의 신곡 ‘위버멘쉬’(Übermensch)까지, 19세기에 활동한 독일 실존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가 제시한 철학 개념어가 21세기 대한민국 대중가요 노래 제목으로 등장했다. ‘아모르 파티’가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라는 니체의 운명관을 보여주는 단어라면, 우리말로 ‘초인’으로 번역되는 ‘위버멘쉬’는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존재,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인간상을 의미한다. 지드래곤은 7년여 만에 정규 앨범 ‘위버멘쉬’를 발표하고, 자신이 니체 철학에 심취해 있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지드래곤의 니체 사랑은 201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군 복무 중이었던 그가 소셜미디어를 통해 자신이 읽고 있는 책으로 소개한 책이 바로 ‘초역 니체의 말’(삼호미디어)이었다.



    “신은 죽었다”라는 아포리즘으로 유명한 니체는 불행한 삶을 살아낸 철학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어려서부터 천재 소리를 들으면서 자랐고, 20대 중반 대학교수가 된 뒤 세상을 전복시킬 메시지를 내놓았지만, 40대 중반 정신착란이 나타나 정신병원에 입원했고, 이후 10년을 그곳에서 보내다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다른 천재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니체 철학 역시 죽음 이후에 더욱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유럽으로부터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대한민국에서 대중예술의 주요 소재로 소환되어 커다란 사랑을 받고 있다.



    출판 시장에서도 니체 열풍은 제법 오래됐다. 지드래곤이 소셜미디어에 소개한 ‘초역 니체의 말’이 진원지였다. 2010년에 처음 번역 출간돼 ‘소리 없이 강한 책’으로 입소문이 난 이 책은 현재까지 10만부 이상 팔리면서 니체 철학 입문서이자 스테디셀러로 자리를 잡았다.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일본 철학자 시라토리 하루히코(白取 春彦)가 니체의 주요 명언을 엮은 이 책은 일본에서도 200만부 이상 팔렸다. 이 책의 인기에 힘입어, 여러 니체 관련 책들이 앞다퉈 출간됐다. ‘마흔에 읽는 니체’(유노북스), ‘니체 인생수업’(하이스트), ‘혼자일 수 없다면 나아갈 수 없다’(포레스트 북스), 그리고 ‘위버멘쉬’(떠오름) 등에 이르기까지, 수십 종의 니체 명언집들이 독자들의 선택을 기다리며 서점 매대 위에 놓여 있다.



    왜 지금 대한민국은 니체 열풍일까? 니체 철학은 과연 제대로 번역되며 이해되고 있는 걸까? 자기계발이라는 목적으로 너무 가볍게 소비되는 것은 아닐까? 프리드리히 니체의 여동생인 엘리자베트는 오빠의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것을 보고 약삭빠르게 ‘니체 문서보관소’를 만들었다. 니체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유고를 임의로 편집해 ‘권력에의 의지’를 출간했다. 반유대주의자였던 엘리자베트에 의해 니체 철학은 교묘하게 왜곡됐고, 나치는 그것을 프로파간다에 이용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산 자가 죽은 자의 생전 말과 생각을 가지고 부와 명예를 얻은 셈이다. 무덤 속에 있는 니체는 지금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니체 열풍’을 과연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지 자못 궁금해진다.



    홍순철 BC에이전시 대표·출판칼럼니스트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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