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테이트 모던서 개인전 열고 있는
세계적 설치미술가 서도호 인터뷰
전시장 중앙에 펼쳐진 신작 '네스트(Nest/s·2024)'. 서울, 뉴욕, 베를린, 런던 등 작가가 살았던 10개 방을 실물 크기로 재현해 이어붙였다. 작가는 "처음으로 집을 겹쳤고, 어떤 공간은 큰 집 안에 완전히 들어가 있다"며 "지금껏 살았던 모든 집이 모이고 겹쳐 공간의 기억이 된 것"이라고 했다. /테이트 모던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가벽 없이 탁 트인 전시장에 천으로 지은 집과 종이로 만든 한옥이 들어섰다. 모두 실물 크기다. 개관 25주년을 맞은 영국 런던 테이트 모던 블라바트닉 빌딩 2층. 일요일 오후 전시장은 전 세계에서 몰려온 관람객으로 북적였다. 작가가 거쳐간 거주 공간을 옥색, 분홍색, 보라색 등 색색의 반투명 천으로 연결한 신작 ‘네스트(Nest/s)’ 앞에 줄이 길게 이어졌다. 휠체어 탄 관객도, 유모차 끌고 온 부부도 홀리듯 작품 안에 들어가 집 속을 거닐었다. 서까래와 기둥, 창살과 현판까지 재현한 종이 한옥을 한참 올려다보는 20~30대 관객들도 눈에 띄었다. 작가가 유년기를 보낸 서울 성북동 한옥 외벽을 종이로 덮고 흑연으로 문질러 탁본한 ‘러빙/러빙(Rubbing/Loving) 프로젝트: 서울 집’이다.
글로벌 설치미술가 서도호(63)가 세계 현대미술의 최전선인 테이트 모던에서 열고 있는 개인전 ‘서도호: 집을 걷다(Walk the House)’ 풍경이다. 작가의 초기작부터 신작까지 포괄하는 대규모 전시로, 현대차 후원으로 제네시스가 테이트 모던과 여는 첫 파트너십 전시다. 현재 런던에서 아내, 두 딸과 살고 있는 그를 런던 스튜디오에서 만났다. 작가는 “무슨 작품을 보여주느냐, 어떤 목소리를 낼 것인가보다 작품들을 어떻게 보다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느냐에 굉장히 공을 들인 전시”라고 했다.
서도호 개인전에 전시된 신작 설치작품 '네스트'(2024). /테이트모던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휠체어 탄 관객도 들어갈 수 있는 신작
전시장 중앙에 길게 펼쳐진 ‘네스트’가 이번 전시 하이라이트. 서울, 뉴욕, 베를린, 런던 등 그가 살았던 10개 방과 복도, 출입구를 실물 크기로 재현해 길게 이어붙였다. 현실에선 불가능한 건축이 바느질을 통해 구현된 셈이다. 통로를 거니는 관객들은 반투명 천의 색이 바뀔 때마다 환풍기 달린 작업실에서 완자살 무늬 한옥으로 공간 이동하는 체험을 한다.
작가는 “작은 방을 이어 긴 통로를 만든 이전의 ‘허브’ 시리즈와 연결된 신작”이라며 “원래 기존 작품을 전시하려다 신작을 만든 건 미술관의 확고한 철학 때문”이라고 했다. “기존 작품은 통로 너비가 90~120cm밖에 안된다. 한 사람이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좁다. 그런데 테이트모던은 규정상 너비가 180cm 이상이 돼야 한다. 휠체어 타는 관객이 들어갈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라도 못 들어가면 모두 들어갈 수 없다는 게 미술관의 철학이다. 그 철학을 존중해 휠체어도 들어가고, 여러 명이 나란히 걸을 수 있는 완전히 새로운 작품이 탄생했다.”
신작 설치작품 '네스트'(2024). /테이트모던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전시공간 벽을 과감히 없애고 개방형 구조로 꾸민 것도 인상적이다.
신작 설치작품 '퍼펙트홈' 외부 모습. ‘퍼펙트홈: 런던, 호샴, 뉴욕, 베를린, 프로비던스, 서울’(2024)의 외부 모습. /테이트 모던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또 다른 설치 작품 ‘퍼펙트홈: 런던, 호샴, 뉴욕, 베를린, 프로비던스, 서울’도 관객들이 오래 머무는 공간이다.
“지금 살고 있는 런던 아파트를 하얀 반투명 천으로 실제 크기로 만들고, 그 윤곽 속에 이전에 살았던 집들의 문 손잡이, 스위치, 전기 콘센트 등을 원래 위치에 맞게 바느질해 넣었다. 원래 제목은 ‘런던 홈’이었다. 지금 런던 집에 앉아 벽을 바라보면 성북동 집과 뉴욕 집이 보인다. 환상이 보인다는 게 아니라 집의 기억이 내 머릿속에 남아있다는 거다. 물리적으로 나는 런던에 살고 있지만, 지금껏 내가 살았던 모든 집이 모이고 겹쳐 공간의 기억이 된 것이다. ‘네스트’도 마찬가지다. 집을 직선으로 잇기만 한 게 아니라 처음으로 겹치기 시작했다. 어떤 공간은 큰 집 안에 완전히 들어가 있다.”
신작 설치작품 ‘퍼펙트홈: 런던, 호샴, 뉴욕, 베를린, 프로비던스, 서울’(2024) 내부를 감상하는 관람객들. /테이트모던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퍼펙트홈: 런던, 호샴, 뉴욕, 베를린, 프로비던스, 서울’(2024)의 세부 디테일. /테이트 모던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왜 천으로 집을 짓나?
그는 “유학 가서 살았던 미국 집이 처음엔 어색했다. 문 손잡이도 스위치도 높이가 다른 게 제 몸에 불편했고, 인치라는 단위도 감이 딱 오지 않았다”며 “우연히 철물점에서 센티미터와 인치가 모두 있는 줄자를 샀고, 그때부터 아파트도 재고 학교 복도도 재고 다녔다. 닥치는대로 재고 스케치북에 기록했던 것들이 작품으로 나오기 시작했다”고 했다.
런던 테이트 모던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는 설치미술가 서도호. /테이트모던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서울 성북동 한옥 외벽을 종이로 덮고 흑연으로 문질러 탁본한 '러빙/러빙(Rubbing/Loving) 프로젝트: 서울 집'(2013~2022)./테이트 모던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성북동 한옥 탁본을 주저했던 이유
종이로 탁본한 서울 한옥집도 관람객을 매혹한다. 한국 수묵 추상의 대가인 부친 서세옥(1929~2020) 화백이 창덕궁 연경당을 본따 지은 한옥이다. 서도호는 유년 시절 추억이 깃든 이 집을 닥종이로 감싸고 흑연으로 문질러 고스란히 떠냈다. “천 작업이 아무리 정교해도 공간에 대한 정보를 100% 전하진 못한다”는 것이 ‘러빙, 러빙’ 프로젝트의 시작이었다. 그는 “성북동 집을 탁본하고 싶었는데 학생 신분일 땐 경제적 여력이 안됐고, 그러다 1990년대 남북한 긴장이 고조되면서 성북동 집이 당장 날아갈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느꼈다”고 했다.
“탁본을 하려면 흰 종이를 뒤집어 씌워야 되는데 우리나라에서 흰색은 죽음을 뜻하기도 한다. 소복을 입는 것도 그렇고, 염을 할 때 한지를 뒤집어 씌운다. 그래서 마음 속 갈등이 많았다. 그때는 아버님이 정정하셨고 마당을 계속 가꾸셨기 때문에 한옥에 종이를 씌운다고 하면 허락도 못 받았을 거다. 그러다 아버님이 연로해지고 마당으로 내려오는 빈도가 점점 줄어드는 시점이 됐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다음에 하면 너무 슬퍼서 못했을 거다. 아버님 살아계실 때 작업해야 할 것 같아서, 더 이상 늦출 수 없었다. 아버님은 아무 말씀도 안하셨다. 종이를 붙이고 그대로 놔둔 것만 9개월이다. 제가 서울에 살지 않으니 올 때마다 조금씩 작업을 했다.”
작가가 서울 성북동 한옥집에 종이를 붙이고 흑연으로 문질러 탁본하는 모습. 전시장에서 영상으로 볼 수 있다. /허윤희 기자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탁본 작업은 어땠나.
“종이를 다 붙여놓고 어느 새벽 안개낀 날, 그 집을 내려다보는데 섬찟한 기분이 들었다. 3차원 공간에서 색을 다 뽑아낸 거니까. 그 경험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기억이 얼마나 허약한 것인지도 체감하게 됐다. 제가 살았던 공간이라 한옥집을 너무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종이를 뒤집어씌우니 디테일이 하나도 생각이 안나더라. 기억이라는 게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 건지, 기억의 부정확성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됐다.”
전시를 기획한 나빌라 압델 나비 테이트모던 국제미술 수석 큐레이터는 “이번 전시는 시간과 장소를 가로질러 우리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공간을 시각적으로 만나는 경험”이라며 “그의 작업은 단순히 개인의 기억과 이야기를 뛰어넘어 집과 정체성, 이주의 경험, 우리의 삶과 공동체가 연결된 방식을 탐구한다”고 했다. 10월 19일까지.
[런던=허윤희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