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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06 (토)

    이슈 책에서 세상의 지혜를

    산림동에서 반세기…‘호모 파베르’를 기록하다 [.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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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림동의 ‘만드는 사람들’이 함께 사진을 찍었다. 수십년간 쇠를 다루고 기계를 만들어온 사람들이다. ⓒ안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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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에선 없는 것을 만든다. 설계도만 있으면 로켓도 만든다”라는 말이 있다. 세운상가와 주변 청계천·을지로의 전문가들이 보유한 기술력과 장인 정신을 표현한 말이다. 이곳의 또 다른 이름은 서울 중구 을지로3가 산림동. 한국 제조업 생태계의 중심이다.



    산림동 장인들의 삶과 도시계획 문제를 다루는 책이 나왔다. ‘산림동의 만드는 사람들: 호모 파베르’는 거의 한평생 손으로 기계를 만지고 금속을 다뤄온 제조기술자 38인의 이야기와 재개발 투쟁사를 담았다.



    산림동은 금속제조업 밀도가 높은 지역으로 6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한다. 책의 주인공인 인터뷰이들은 평균 50년 가까이 청계천에서 일하면서 그 자신이 마을의 풍경이 되었다. 차례차례 생겨난 여러 소공장, 기계 개발 산업의 최전선에서 일해온 사람들의 얼굴과 손에는 세월의 감각이 아로새겨졌다. 시간의 더께가 내려앉은 기계에도 표정이 생겼다. ‘청계천’은 세계 어디에도 없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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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경시보리 한대식 대표. 재개발로 무작정 쫓겨날 수 없어서 2019년 산림동상공인연합회를 설립했다. 현재 산림동 임시영업장(산림동 134-3)으로 이주했다. ⓒ 이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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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제는 도시의 역사를 담은 산림동이 사라지게 됐다는 점이다. 2002년부터 이명박 전 시장이 청계천 복원 공약을 내놓고 서울시 및 국가 주도로 전면적인 재개발을 시작했다. 서울시는 2003년 청계천 복원 공사를 시작했고, 2010년엔 대체 상가인 ‘가든파이브’가 준공됐다. 2011년 취임한 박원순 전 시장 재임기엔 상인들과 ‘청계천을지로보존연대’의 요구에 따라 개발과 정비에 초점이 맞춰졌던 세운상가 일대의 관리 방향이 보전과 재생 쪽으로 잠깐 바뀌기도 했다. 수많은 도심 재개발이 시행되었지만, 서울시가 재개발 구역 안에 영세 상인을 위한 거점을 마련한 것도 처음이었다. 이렇게 200호가 넘는 대체 공장이 마련돼 산림동의 기술자 모두가 한꺼번에 재정착할 가능성도 열렸다.



    하지만 절반 이상의 계획이 틀어졌다. 박 전 시장이 무책임하게 세상을 떠나고 ‘개발주의자’ 오세훈 시장이 2021년 보궐 선거로 시장직에 복귀한 것이다. 그는 세운상가를 방문해 오래된 산림동 지붕을 보고 “피 토하고 싶은 심정”이라고 했다. ‘개발 일성’이었다. 책은 오 시장이 왜 이리 세운상가 철거에 집착하는 것인지, 초고층 빌딩 숲으로 이 지역을 만드는 것이 타당한 결정인지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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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공업사 옆 산림동 190-20번지 건물은 서울역사박물관에서 2010년 발간한 ‘세운상가와 그 이웃들1’에서 주요 일제강점기 건축물로 꼽혔다. 이곳에는 신강상회와 동아펌프가 있었으며, 2층은 창고로 사용되었다. 100년 정도 된 집으로 추정되지만, 재개발로 철거되었다. 리슨투더시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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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시의 재개발 계획으로 이 세계 유례없는 제조업 생태계 터전이 사라지게 됐다. 오랫동안 모여 있었기 때문에 더욱 시너지를 발휘하던 숙련 기술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산림동은 철거에 들어갔고, 200개 업체 중 이주 단지에 입주하기로 한 17개 공장을 제외한 나머지 공장들은 다른 지역으로 이전하거나 이미 폐업했다. 이곳에서 터 잡고 살아가던 14명의 전문가들은 바로 옆 임시 영업장에서 일을 이어가고 있다.



    책의 맨 앞에 등장하는 ‘문경시보리’ 한대식 사장은 2019년 산림동상공인연합회를 설립한 사람으로, “회장님”이라고 불린다. 경북 상주 출신인 그는 1975년 서울에 왔다. 그에게 청계천은 “한평생 몸을 바친 삶의 터전”이다. “한평생 잘 살았다고 자부할 수 있는, ‘과연 이렇게 좋은 지역이 있을까’ 하는 그런 곳”이다. 이철호 기술자 부부가 살아온 ‘기영사’ 맞은편 가옥은 산림동 주요 일제강점기 건축물이다. 외부 마감은 시멘트 흩뿌리기 미장으로 돼 있고 옛날엔 ‘신흥상회’라는 곡식류 판매점으로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2층으로 가는 입구에는 ‘가정집’이란 간판이 붙어 있다. 독특한 외관으로 많은 이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이 건물은 재개발로 철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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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철거된 입정동 3-1, 4, 5 구역. 현재 현대 힐스테이트가 들어섰다. ⓒ박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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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체 상가에 들어가는 사람, 폐업하는 사람, 다른 곳으로 옮기는 사람 등 이제 30여년을 같이 지냈던 이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우일정밀’ 장진오 사장은 “어떤 말을 어떻게 하더라도 진심인지 그냥 농담하는 건지 속마음까지 알 수 있”었다고, “많이 서운”하다고 말한다. 시골에서 태어나 정읍에서 살다 서울로 온 그에게 청계천이란 “고향”이고 시골 출신 자신에게 “시골 분위기”를 안겨준 곳이다. ‘진정하고 착하라’는 뜻의 ‘선진기어’를 운영해 온 정선모 기술자는 재개발 때문에 부천시로 이주했다. 그는 “모든 소비재는 제조를 통해 만들어진다. 산업 생태계의 뿌리가 죽으면 나무도 그 자체가 나중에는 말라 죽을 거 아니냐”고 말했다. “손에 많이 익어야 나오는 게 기술”(‘동아기공사’ 김동수)이라는 점을 알고 있는 이들은 “엄청난 기술력”을 지닌 존경받는 동료들이 아파트 경비를 하러 간다는 소식을 종종 듣는다. “그런 분들이 반강제적으로 보상을 받고 집에서 쉬게 되는 게 너무 아까워요.” ‘대흥공업사’ 김종열 사장은 무인 자동차의 몸체 전체를 만들었다. “직접 보니까 상당히 자부심이 생기더라고요. 전자 쪽은 의뢰인이 맡고, 기계 쪽은 제가 맡아서 했어요.” 그는 산림동이 사라지는 데에 대해 섭섭함을 감추지 않았다. “제 평생을 바쳤는데 얼마 안 있으면 청계천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솔직히 아직도 울먹울먹하네요. 제 자식 같은 청계천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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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림동 골목. ⓒ최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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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은 2009년 결성된 예술 집단인 리슨투더시티가 만들었는데, 이들은 도시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미학적으로 해석하고 개입하면서 출판과 전시 프로젝트를 병행해 왔다. 도시 공간의 변화를 기록하고 재개발, 재난 현장의 목소리를 담으면서 예술적 실천을 계속했다. 평생을 바쳐 ‘만들어온’ 사람들을 기록하기 위해 리슨투더시티는 지난 7월부터 한달 동안 북펀딩을 했고 600쪽짜리 아름다운 아트북이자 역사 속으로 사라질 도시 공간과 마을 주민들의 생애에 대한 인류학적 보고서를 완성했다.



    지난 1일 서울시는 청계광장에서 ‘청계천 복원 20주년’ 기념식을 열었다. 화려한 레이저쇼를 펼치고,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자 전 대통령이 참석해 자화자찬했다. 저자들은 말한다. “도시민이 도시 주권의 주체가 되는 도시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선택은 시민에게 달려 있다. 우리의 도시를 우리의 것으로 만들려는 관심과 의지로 다시 청계천을 되찾자.”



    리슨투더시티와 청계천을지로보존연대는 산림동 제조·유통 상인들이 주문을 받고 판매할 수 있는 플랫폼 ‘호모파베르’(homo-faber.vercel.app)를 개설했다. 이 플랫폼에서 업체명과 인터뷰, 용어 설명, 프로젝트 의뢰 방법 등을 문의할 수 있다. 이 예술적이고도 감동적인 독립출판물 또한 리슨투더시티 누리집(listentothecity.org)에서 구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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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림동의 만드는 사람들 l 박은선 등 지음, 리슨투더시티, 4만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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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림동의 역사를 간직한 골목. ⓒ박은선 리슨투더시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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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유진 선임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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