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최후의 시민군 정해직 선생. 한겨레 자료 사진 |
75살을 일기로 별세한 ‘5·18 최후의 시민군’ 고 정해직 선생이 11일 오전 광주시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에 안장됐다.
이날 광주전남민주화운동동지회, 은빛참교사회 등 9개단체 주최로 국립5·18민주묘지 추모탑 앞에서 열린 영결식에서 참석자들은 평생 오월정신 계승과 참교육 운동에 헌신해 온 고인의 삶을 추모했다. 강기정 광주시장은 추모사(대독)에서 “불의에 눈감지 않으셨고, 광주 공동체의 아픔을 가장 가까이서 나누셨으며, 오월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헌신했다”며 영면을 기원했다.
고인은 1980년 5·18항쟁 마지막 날 총을 들고 광주를 지켰던 시민군 250여명이 만든 ‘5·18광주민중항쟁 최후의 시민군 동지회’ 초대 회장을 지냈다. 5·18항쟁시민군 지도부 민원부장이었던 그는 계엄군 재진압 전날 밤, 민원부 학생들 10여명을 집으로 돌려보낸 뒤 시민군 거점이었던 옛 전남도청에 남았다. “저 담만 넘으면 살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발걸음이 나도 모르게 그쪽으로 가더라고요. 차마 그럴 수는 없었어요. 동지들을 남겨두고 나 혼자 살겠다고… 제대로 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교사가….”(2020년 5월 한겨레 인터뷰)
11일 오전 광주시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열린 ‘5·18 최후의 시민군’ 고 정해직 선생 영결식에서 유족들이 고인을 추모하고 있다. 정대하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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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은 ‘5·18 최후의 시민군’ 중 67번째로 세상을 떴다. 채영선 5·18광주민중항쟁 최후의 시민군 동지회 부회장은 “80년 5월27일 당일 19명이 총상 등으로 사망했고,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한 동지들이 47명이며, 정해직 동지가 48명째이며, 40여명이 병상에서 투병 중”이라고 했다.
그는 해직이라는 이름처럼 두차례 ‘해직’됐다. 5·18시민군으로 나섰다가 내란죄로 기소돼 10개월 옥살이를 한 뒤 초등학교 교사직에서 쫓겨났고, 1983년 특별채용으로 교단에 복귀했지만 19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창립에 참여해 초등위원장을 지내는 등 참교육 투쟁에 나섰다가 또다시 해직됐다. 고문 후유증으로 건강이 좋지 않아 2005년 퇴직한 뒤 수년간 신경계 퇴행성 질환인 파킨슨병을 앓아 보행이 불편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했다.
11일 오전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열린 5·18 시민군 정해직 선생의 민주장 영결식에서 참석자들이 추모탑으로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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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팡이 두개를 짚고도 5·18 행사에 참석하는 등 사회의 ‘현안’과 역사의 ‘현장’에 대한 관심을 거두지 않았다. 그는 “오월정신을 창의적으로 계승할 일꾼들을 길러내는 오월학교를 설립하고 싶다”던 생전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지난 9일 세상을 떠났다.
김전승 광주흥사단 대표는 “최근까지도 건강하지 못한 몸으로 행사에 나오셔서 끊임없이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과제를 놓고 문제를 제기하는 모습을 보여주셨다. 분열된 조직의 통합과 오월 정신의 계승, 민주주의 교육의 산 증인이셨다”고 고인을 기억했다.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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