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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06 (토)

    이슈 책에서 세상의 지혜를

    “책 없는 세상으로 와서 책이 되어주세요” [.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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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레

    강성민 출판도시문화재단 이사장이 21일 오전 경기 파주시 문발동 지혜의숲의 ‘책 없는 서가’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기에 앞서 사진을 찍고 있다. 김영원 기자 forever@hani.co.kr


    책 축제는 끊이지 않지만, 책 읽는 독자는 말라간다. 전국 각지에서 책 축제가 릴레이하듯 진행되고, 이에 대한 시민들의 호응도 여느 때보다 뜨겁지만, 이 열기가 일상의 독서를 덥히고 있다고 느껴지진 않는다. 축제와 일상 사이를 반투명 유리 벽이 가로막은 것만 같다.



    24∼26일 사흘간 경기도 파주시 출판도시 일대에서 치러지는 책 축제 ‘파주페어 북앤컬처’는 독자를 색다른 벽 앞에 세운다. 책이 사라지고 파편적인 문장만 남은 거대한 ‘책 없는 서가’다.



    “책 없는 세상을 시각적으로 펼쳐놓는 전시를 해보고 싶었어요.”



    축제를 사흘 앞둔 지난 21일 경기 파주시 ‘문발살롱’에서 강성민 출판도시문화재단 이사장을 만났다. 재단 이사장이지만 철저히 실무형이라 ‘파주페어 북앤컬처’ 속 책 프로그램 ‘북소리’를 직접 기획했다. 그가 고안한 행사 주제가 바로 ‘책 없는 세상’이다.



    “에이아이(AI, 인공지능)가 나타나고 책이 죽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어요. 에이아이가 보여주는 정보의 퍼포먼스가 너무 놀라워서요. 사람들이 완전히 빠질 수도 있겠구나, 20년 가까이 해온 출판사(그는 출판사 ‘글항아리’ 대표다)를 접을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 그러다 문득 책이 없다고 생각해 봤어요. 가장 두려워하는 현실을 상상했는데, 오히려 묘한 해방감이 들더군요. 같은 고민을 품고 사는 출판사들도 어쩌면 유쾌하게 동참해 주지 않을까, 그럼으로써 축 처진 출판계의 분위기를 끌어올릴 수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책 없는 세상’이라는 발상으로 전시와 도서전을 준비했다. ‘책 없는 서가’에는 책 대신 책에서 발췌한 책에 관련된 문장 200개를 전시한다. 이 가운데 12개는 소설가 김애란, 김연수, 박상영 등이 고심해 지어낸 가짜 문장이다. 그는 “책이 아니라 문장을 엽서 같은 종이에 인쇄해 전시한다”며 “독자들이 자신이 사랑하는 작가의 문체를 감별해 내도록 하는 장치도 둬서 흥미롭게 관람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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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성민 출판도시문화재단 이사장. 김영원 기자 forev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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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권 마켓-세상 끝의 서점’도 이색적이다. 자사의 리스트를 모두 판매대에 올리는 기존 도서전의 문법을 떠나, 출판사의 철학을 응집하는 딱 한권만 팔도록 제한을 뒀다. “딱 한권 안에도 엄청난 세계가 있어요. 출판사는 그 한권을 독자에게 팔기 위해서 최선을 다합니다. 축제를 방문하는 분들에게 이런 노력을 느끼게 해드리고 싶었어요. (…) 저희 글항아리는 신간 ‘웍과 칼’을 파는데, 그걸 위해서 훠궈집에서 사용감 있는 웍을 빌리고, 유명한 중식 셰프 왕육성씨에게 주방 도구까지 빌렸어요. 단무지 모양 책갈피도 준비했고요. 출판사 ‘마음산책’은 건축가 이타미 준의 세계를 부스에 펼치고, ‘북스피어’는 부스를 일본 이자카야 거리로 만들 겁니다.” 참여사가 부스 사용료를 지불하는 일반 도서전과 달리, 북소리는 출판도시문화재단과 경기도, 파주시의 지원으로 부스비를 충당한다. 그는 “100개 부스 모집에 238개 출판사가 응모했다”며 “최종 선정된 출판사의 약 70%가 1인 출판사”라고 했다.



    책과의 ‘우연하지만 실패 없는 만남’을 기대하는 독자를 위한 장치도 있다. 바로 다른 출판사 책 추천. 참여사 100곳이 타사의 책 한권을 추천해 서점에서 판매한다. ‘업자’이자 ‘선수’들의 큐레이션을 독자가 만나도록 한 것이다. 북소리 주요 기획자 김홍민 북스피어 대표는 앞서 “타사 책 추천이라는 새로운 방식을 통해 출판계가 연대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발한 축제여도, 축제는 언젠가 끝난다. 그리고 지난한 일상이 이어진다. 강 이사장의 시선은 그 일상까지 가닿는다. “솔직히 도서전 끝나면 뭔가 텅 빈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느낌이랄까요. 출판인들이라면 아마 공감할 겁니다. 책과 관련된 경험이 일상에서 이어지도록 축제의 방향을 재설정해야 하지 않을까 고민하고 있습니다. 출판도시문화재단은 책과 관련한 공동체의 기억을 발견, 유지, 발전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공동체의 경험이 없는 것들은 쉽게 약화되고 소실될 수 있거든요. (…) 파주 출판도시가 1년 내내 책과 관련된 행사가 이뤄지고, 책에서 뻗어 나온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공간이 되었으면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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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성민 출판도시문화재단 이사장. 김영원 기자 forev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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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주페어를 시작으로 내년 10월까지 약 1년 동안 파주 출판도시 곳곳에서 진행되는 류장복 화가의 ‘도시에 펼쳐진 개인전’은 그 일환이다. “화이트 박스에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된 그림을 보는 게 일반적인 미술 관람인데, 여기에 현장성과 장소성을 더해보려 했어요. 도시 곳곳에 작품들을 펼쳐 놓고 한 화가의 작품 세계를 읽어 나가는 경험을 하도록 하는 거죠. 미술 감상도 하나의 읽기니까요. 파주 출판단지가 입주 20여년이 되면서 1층에 공실이 적지 않거든요. 이 공간에 류 화가의 작품을 걸고 24시간, 365일 불을 켜두려 합니다. 그리고 류 화가는 그 공간에서 바라본 도시의 풍경을 새로 담아낼 겁니다. 출판도시를 예술적 경험이 이뤄지는 일상적 공간으로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입니다.”



    파주페어 북앤컬처는 책과 공연이 어우러지는 복합문화축제를 모토이자 차별점으로 내세운다. 뮤지컬 ‘알사탕’, 프린지(fringe·주변부라는 뜻으로 상상력과 실험성을 추구하는 대안 문화축제) 쇼케이스 등 책에서 뻗어 나간 공연을 도서전과 함께 선보인다. “책과 강하게 결합된 공연을 선별해 공연을 보고 한권의 책을 읽는 것 같은 감각을 주려고 합니다. 재밌게도 저희가 당초 참여단체를 선정할 때 도서·비도서 부문을 나눴는데, 책과 무관한 공연은 거의 없더군요. 앞으로도 책을 둘러싼 문화를 진전시키고 있다는 경험과 확신을 얻어가는 방향으로 일을 해 나가려 합니다.”



    마지막으로 독자를 ‘책 없는 세상’으로 초대하는 초대장을 써달라고 청했다. “책이라는 게 그저 딴 세상의 물건인 분들도 계실 겁니다. 이분들은 이미 책 없는 세상을 살아가지만, 어쩌면 각자가 하나씩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품고 있는 책일지도 모릅니다. 그 책들을, 초대합니다. 책 없는 세상으로 와서 책이 되어주세요. 당신을 읽고 싶습니다.”



    최윤아 기자 a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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