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구금·연행 중 계엄군에 성폭행 당해
40년간 못 잊다 ‘서로의 증언자’ 된 생존자들
지난해 정부 상대 첫 집단 손해배상 소송 제기
“국가가 오래 침묵한 만큼 충분한 배상 해줘야”
5·18 계엄군과 경찰이 자행한 성폭력 피해 증언자 모임 ‘열매’가 7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첫 재판 관련 기자회견을 마친 후 피해자를 위한 진실과 치유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이날 성폭력 피해자와 가족 등 17명은 45년 만에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의 첫 재판에 참석했다. 한수빈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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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서울중앙지법 560호 법정의 방청석 앞줄에 붉은 꽃이 그려진 스카프를 맨 여성 13명이 모여 앉았다.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지팡이를 잡은 이들은 서로의 표정을 걱정스럽게 살피며 끌어안았다. 누군가 눈물을 쏟으면 서로의 등을 토닥여줬다.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으로부터 성폭력을 당한 피해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첫 집단 소송의 재판이 이날 시작됐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22부(재판장 최욱진)는 이날 성폭력 피해 생존자 14명과 가족 3명 등 17명이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의 1차 변론을 진행했다.
5·18 성폭력 피해 생존자들은 사회적 낙인 탓에 가족에게도 말하지 못하다가 2023년 처음으로 피해를 증언했다. 같은 해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직권 조사를 통해 40여년 만에 피해자들의 증언을 모았다. 1980년 5월18일부터 이듬해 1월까지 시위·연행·구금·조사 등 과정에서 일부 계엄군이 자행한 강제추행 및 강간 등 16개 사건에 ‘진상규명’ 결정을 내렸다. 국가기관이 계엄 당시 벌어진 성폭력 사건에 종합적인 진상규명을 한 건 처음이었다.
이후 생존자와 가족들은 지난해 12월 “피해자 한 명당 약 2억원을 배상하라”며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전두환이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12월12일에 맞춰 법적 절차가 시작됐다. 당시 10대에서 30대였던 생존자들은 45년이 흐른 뒤에야 법정에서 국가의 책임을 물을 수 있게 됐다.
5·18 성폭력 피해자 간담회가 열린 지난해 4월28일 전남대학교 김남주홀에서 피해자 정현순씨가 스카프를 하늘로 던져 올리는 치유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정효진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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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 생존자들을 대리하는 하주희 변호사는 이날 법정에서 “계엄군이 외곽 봉쇄·광주 재진입·연행·구금 등 헌정 질서 파괴 행위를 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강간과 강제추행”이라면서 “군부의 지시로 완벽하게 통제된 상황에서 계엄군의 폭행과 협박, 동조와 방조 내에서 자행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국가가) 오래 침묵한 이후에 국가기관의 진상규명을 통해 이뤄진 사건인 만큼 충분한 배상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부 측 대리인은 “원고들이 주장하는 피해에 대한 소멸시효가 완성됐다”며 피해가 발생한 1980년 5월을 기준으로 소멸시효를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행법상 국가배상은 ‘피해자가 손해 및 가해자를 안 날’로부터 3년 또는 ‘불법행위가 있었던 날’로부터 5년 안에 청구해야 하는데, 원고들은 이 기간이 지나 국가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취지다. 이어 “조사위 결과 ‘진상규명 불능 결정’을 받은 고인들도 있다”면서 실제 성폭력 피해가 있었는지부터 법정에서 추가로 따져봐야 한다고 했다.
이에 하 변호사는 성폭력 피해에 대한 진상규명이 결정이 내려진 2023년 말을 기준으로 봐야 하고, 이때부터 3년이 지나지 않아 배상 청구가 가능하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과거 보상금을 받은 사례는 (계엄군의) 연행 구금으로 받은 것이지 성폭행 피해와 관련된 게 아니다. 5·18 당시 성폭행으로 보상을 받은 적은 없어 무관하다”고 말했다. 진상규명 불능 결정을 받은 원고 1명에 대해서는 “당시 (피해를) 진술하지 못했던 이유와 과정들을 별도로 입증해 나가겠다”고 했다.
재판부는 다음 해 1월16일 두 번째 재판을 열기로 했다. 방청석에서 두 손을 맞잡은 채로 재판을 지켜보던 한 피해자는 울먹이면서 “45년을 기다렸는데 너무 힘들다. 빨리 (재판을) 받을 수 있게 해달라”고 말했다. 재판부는 “정해진 절차에 따라서 빠르게 진행해 드릴 것”이라고 했다.
이날 재판에 앞서 피해 생존자들은 기자회견을 열고 “우리의 몸은 역사의 현장이며 진실의 증거”라며 “진실은 우리를 무너뜨리지 않았고, 오히려 서로를 다시 살게 한 힘이었다”고 밝혔다. 이들은 생존자와 연대하기 위해 찾아온 시민들에게서 평화를 상징하는 열매를 건네받은 뒤 웃으며 법정으로 행진했다.
☞ 기획·연재 | 우리는 서로의 증언자
https://www.khan.co.kr/series/articles/as393
☞ [단독] ‘5·18 성폭력 피해’ 44년 만에 모인 10명…“잊을 수도, 말할 수도 없던” 상처를 기록하다 [우리는 서로의 증언자①]
https://www.khan.co.kr/article/202405021630011
최혜린 기자 cher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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