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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2 (금)

    “환자에 ‘운동하세요’ 말 대신 함께 뜁니다”…암환자 러닝크루 만든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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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희정 서울아산병원 유방외과 교수
    “운동은 함암후 투병 이길 힘 길러줘
    MY HOPE 크루 결성해 기적의 레이스”


    매일경제

    김희정 서울아산병원 유방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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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료실에서 모니터를 사이에 두고 마주 봤던 사람들이 이제는 트랙 위에서 한곳을 바라보며 달린다. 크루장은 암 전문의, 크루원은 암 환자와 그들의 가족·친구들이다. 지난 1일 창단된 서울아산병원 ‘마이 호프(MY HOPE)’ 크루 이야기다. 크루를 기획한 김희정 서울아산병원 유방외과 교수는 “젊은 암 환자들이 달리기를 통해 마음의 짐을 훌훌 날려버리길 소망해서 창단했다”고 말했다.

    이날 김 교수를 비롯해 10팀의 암 환자 크루가 성내천 둔치에 모였다. 유모차를 끌고 온 아빠, 암 투병을 하다 만나 친해진 친구 등 사연도 제각각이었다. 40대 김 모씨는 동네 학부형들과 한 팀을 짰다. 그는 “신나게 암을 이겨낼 수 있게 해준 친구들”이라고 소개하며 “제가 힘들 때 아들 통원까지 대신 해줬다”고 고마움을 전했다. 20년 지기 대학 동기와 함께 온 30대 조 모씨도 “꾸준히 기초체력을 길러 내년 4월엔 한라산 등반을 다 같이 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5㎞ 레이스에 참가한 김 교수도 암을 이겨낸 엄마를 따라온 아이들 손을 잡고 천천히 오래 달렸다. 모두가 ‘암 이후의 레이스’를 향해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매일경제

    성내천에서 달리기 하는 김희정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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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암치료를 마친 뒤에는 암과의 마라톤 같은 싸움이 시작된다. 퇴원 후에도 짧게는 5년, 유방암의 경우 10년 이상을 추적 관찰해야 한다. 김 교수는 최근 젊은 암 환자가 늘면서 치료 이후 삶의 질 관리가 더욱 중요해졌다고 강조했다. 그는 “유방암 환자 셋 중 하나는 45세 이하”라며 “이들에게 암 치료는 장기전이기에 주변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몇몇 환자는 아예 임신이나 출산을 단념하는 경우도 많다. 재발 가능성도 환자들을 집요하게 괴롭힌다. 이에 김 교수는 “운동은 환자가 암을 이겨낼 수 있다는 마음가짐까지 길러준다”며 “함께할 때 혼자가 아니라는 믿음을 갖게 된다”고 덧붙였다.

    환자와의 러닝 크루는 사실 김 교수의 전공 분야다. 작년 가을부터 유방암 환자들과 함께 ‘부지런 크루’을 결성해 활동했다. 자신이 가장 힘을 얻은 달리기로 환자들과 소통하고 싶어서였다. 그는 “진료 때마다 운동하라고 말만 하기 미안했다”며 “이 활동으로 ‘함께의 힘’에 대해 확신을 얻었다”고 말했다. 특히 환자들 반응이 좋았다. ‘월 2회 인증 어디서 하지’라는 즐거운 고민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만남의 계기가 생기니 희망은 절로 싹텄다. ‘애기도 두 돌이면 뛴다’는 친구의 격려에 투병 2년 만에 운동화 끈을 고쳐 맨 환자도 있었다.

    매일경제

    성내천에서 달리기 하는 김희정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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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이 몸담고 있는 서울아산병원에서 판을 벌인 건 올해 7월경. 이 경험을 타 암종까지 넓히고 싶었다. 동료 교수들과의 대화에서 “한번 해보자”는 말이 오가며 거짓말처럼 급물살을 탔다. 김 교수는 창단 과정이 ‘기적의 연속’이었다고 말했다. 1년간 스케줄이 대체로 짜여 있는 교수들의 일정을 맞추기부터가 난관이었다. 마라톤의 계절인 11월 첫 주 주말, 그것도 토요일. 딱 하루 기적처럼 모두가 시간이 맞았다. 날씨까지 도왔다. 크루가 첫 창단식을 마치자마자 거짓말처럼 비가 쏟아졌다. 김 교수도 “정말 마법 같은 날이었다”며 “모든 일엔 때가 있다는데 오늘이 딱 그때였던 건지 술술 풀렸다”고 웃으며 말했다.

    ‘마이 호프’ 크루는 이런 연대의 의미에 더해 환자 돌봄과 지원 기능을 대폭 늘렸다. 의료, 심리, 사회, 운동, 영양 등 서울아산병원 각 분야의 전문가가 함께 참여했다. 청년 암 생존자 통합지원 프로그램으로 크루명 ‘MY HOPE’의 약자도 ‘치유(Healing)·연대(Outreach)·맞춤치료(Personalization)·자립 강화(Empowerment)’의 앞 글자를 따온 것이다.

    김 교수는 왜 이렇게까지 환자와 호흡하려 할까. 이 질문에 그는 또 한 번 ‘기적’이라는 단어를 꺼냈다. 10여 년간 돌보던 환자가 치료를 마치고 ‘졸업 인사’를 하러 병원에 찾아오는 날이었다. 그의 손엔 꽃다발이 하나 들려 있었다. 그 꽃다발을 보는 순간 오전에 집도한 환자가 떠올랐다. 수술 범위가 예상보다 커 펑펑 울던 스물아홉 살 환자에게 회진 때 꽃다발을 안겼다. 환자에게서 또 다른 환자로, 희망이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생각지 않게 받은 꽃다발 같은 기적이 되고 싶습니다. 여기 계신 모든 분도 다른 환자들의 꽃다발이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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