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달 30일 정상회담을 마치고 대화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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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백악관이 자리한 워싱턴은 국제 정치의 중심지로 잘 알려져 있지만 세계 경제와 군사, 정보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미국의 힘은 금융 패권과 군사 패권에서 나오는데 그 심장부가 자리한 곳이다. 뉴욕 월가가 세계 금융 중심지인 것은 분명하지만 월가를 규제하는 재무부·연방준비제도·증권거래위원회 등 연방기관은 모두 워싱턴에 있다. 워싱턴 외곽엔 남쪽에 펜타곤(국방부 청사)이, 서쪽에 중앙정보국(CIA), 동북부에 국가안보국(NSA) 등이 포진해 있다. 이들 기관은 전세계의 정치·외교·경제·군사 정보를 거의 실시간 수집해 분석하며 백악관은 이를 토대로 의사결정을 내린다. 정보기술 발달로 전세계 인터넷망과 금융시스템이 광섬유망으로 촘촘하게 연결돼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마치 로마제국 시대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한’ 것처럼 21세기 모든 길은 워싱턴으로 통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로마제국의 도로는 속주들까지 사통팔달로 뚫려 있어, 로마와 속주들 간 교역 행위의 기반이 됐다. 교역의 확대는 제국의 번영으로 이어졌다. 마찬가지로 미국도 2차 세계대전 이후 자유무역 중심의 국제무역질서의 토대를 세우고, 탈냉전을 계기로 중국·동유럽까지 포용하면서 자본주의의 세계적 확장, 즉 세계화를 이끌었다. 그런데 확장된 상호의존은 언젠가부터 미국이 세계를 관리·통제하는 수단으로 활용되기 시작했다. 2001년 9·11 테러 직후 미국은 이런 경제적 상호의존망이 테러리스트와 그 후원 세력을 추적하는 데 매우 유용한 도구라는 걸 깨달았다. 기축통화인 달러를 매개로 한 모든 금융 거래는 국제결제시스템(SWIFT)을 통하게 돼 있다. 벨기에에 본부를 둔 이 기관은 독립적으로 운영돼왔으나, 미 재무부가 이곳을 압박해 데이터를 들여다볼 수 있는 권한을 얻어냈다. 이후 이 시스템을 통해 테러 자금과 연관성이 보이는 금융 거래를 추적하기 시작했고, 점차 그 대상을 확대해나갔다. 2013년 폭로된 스노든 파일은 다른 측면에서 세계를 놀라게 했다. 국가안보국 계약직 에드워드 스노든은 이 기관이 전세계에 깔린 미국 빅테크의 인터넷망에 감시장치를 달아 광범위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미 정보기관은 각국의 비밀스러운 대화까지도 엿보고 있었다. 로마제국의 도로가 속주들의 정보를 수집하고 필요하면 군대를 파병해 제압하는 데 활용된 것과 비슷한 이치다. 이처럼 미국이 구축한 광범위한 상호의존망은 상업적 확장의 토대이자 미국의 힘을 투사하는 ‘무기’가 됐다. ‘상호의존의 무기화’는 도널드 트럼프가 2017년 대통령이 된 뒤 중국을 압박하기 위해 강도 높은 제재와 수출 통제, 관세 조치를 내리면서 정점을 향해 갔다. 조 바이든 대통령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중국·러시아에 관한 한 트럼프의 길을 이어갔다.
미 관세·반도체-중 희토류 카드로 ‘공포의 균형’
그런데 트럼프 2기 들어 이상 조짐이 나타났다. 트럼프는 지난 4월2일 적·동맹 구분 없이 고율의 관세 부과 계획을 발표하며 그날을 ‘해방의 날’이라 선언했다. 그러자 중국이 곧바로 보복 카드를 꺼내 들었다. 트럼프 1기 때만 해도 중국은 맞대응 카드를 내밀긴 했으나 실질적인 타격을 주는 건 가급적 피했다. 이번엔 달랐다. 중국의 ‘비밀병기’로 알려져온 전략 광물 희토류의 수출 통제를 발표하고 나선 것이다. 시진핑 국가주석은 2020년 공산당 이론지 ‘구시’(求是)에 “국제 생산망의 중국 의존도를 강화해, 외국의 인위적인 공급 차단에 대한 강력한 대응책과 억제력을 구축해야 한다”고 밝힌 바 있는데,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중국은 개혁개방의 설계자 덩샤오핑이 1992년 “중동에 석유가 있다면 중국엔 희토류가 있다”는 말을 남겼을 정도로, 1990년대부터 이 광물의 전략적 가치를 알고 생산부터 정제 기술까지 지배력을 키워왔다. 점유율은 현재 전세계 희토류 생산의 70%, 정제 기술의 90%에 이른다. 희토류는 스마트폰 같은 전자기기부터 배터리·전기차·풍력터빈·첨단무기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사용된다. 중국의 희토류 통제로 생산 차질이 빚어지자 미국 자동차회사 최고경영자들이 백악관에 시급히 해결해달라고 호소했을 정도로 파급력은 컸다. 미·중 고위 관료들은 지난 6월 런던에서 만났다. 당시 회담에서 두 나라는 보복관세 적용을 유예하는 한편, 미국은 엔비디아 인공지능 칩 H20, 중국은 희토류 수출을 각각 재개하기로 합의했다. 중국은 희토류의 치명적 영향력을 확인한 순간이었고, 미국은 처음으로 외국의 제재 위협에 놀라 후퇴하는 굴욕의 순간이었다.
두 나라는 지난달 말 경주 정상회담을 앞두고 또다시 충돌했다. 중국은 이번엔 수출 통제 대상이 되는 희토류를 거의 전 품목으로 확대하고, 희토류 정제 기술까지 대상에 포함했다. 특히 외국 기업이 제3국에 수출하는 제품에 중국산 희토류가 미량(0.1% 이상)이라도 포함되면 중국의 허가를 받도록 했다. 예컨대, 한국산 스마트폰을 영국에 수출할 때도 중국산 희토류가 사용됐으면 중국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얘기다. 이에 트럼프는 100% 추가 관세로 위협했으나 주식시장이 급락하자 또다시 후퇴했다. 결국 트럼프와 시진핑은 회담에서 미국이 관세를 인하해주는 대신 중국은 희토류 수출 통제를 1년 유예하기로 합의했다.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장관은 올해 6월 연설에서 중국의 희토류 시장 장악을 거론하며 “우리는 위기에 처해 있다”고 말했다. 미국 산업이 중국 등 잠재적 적대국들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들이 언제든 공급 중단으로 위협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지정학의 본질 역시 이에 맞춰 조정되고 있다. 이는 새로운 세기의 가장 큰 도전 중 하나”라고 말했다. 트럼프가 중국에 강경한 태도를 보이다가도 중국의 최대 압박 전략에 부딪혀 후퇴할 수밖에 없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세계 경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상호의존 시대에 급소는 바로 글로벌 공급망에 있다. 미국은 관세와 반도체를, 중국은 희토류를 무기로 삼아 상대방의 공급망 교란을 위협하고 있다. ‘상호확증교란’ 전략에 기반한 경제판 ‘공포의 균형’이다. 이제 악순환의 시작일 뿐이다. 냉전 시기 핵으로 ‘공포의 균형’을 이뤘던 미·소가 서로 우위에 서고자 끊임없이 군비 경쟁에 매달렸던 것처럼 미·중도 그런 길을 갈 것이다. 타협을 했으나 ‘불안한 휴전’ 속에 언제든 갈등이 재발할 수 있다는 얘기다.
미·중·러, 중견국·약소국 ‘강탈·강압’ 시대
미-중 간 패권 경쟁은 불행하게도 우리에게 불똥이 튀고 있다. 미국은 동맹국들에 대해서도 미국의 시장 접근과 안보 우산 제공을 무기로 삼아 무차별적으로 관세를 매기고 천문학적 규모의 자본을 흡수해가고 있다. 트럼프는 미국의 이익과 자신의 지지도 상승을 위해서라면 적과 동맹도 구분하지 않는다. 한국의 대미 의존도는 경제뿐 아니라 안보 분야에까지 걸쳐 있어 어느 나라보다도 취약하다. 한국을 번영으로 이끈 상호의존이 이제 ‘양날의 칼’이 된 셈이다. 트럼프가 내민 3500억달러(약 500조원) 청구서는 규모가 워낙 커서 수십년간 한국 경제에 큰 부담이 될 것이다. 투자 구조도 매우 불평등하다. 20년간 원리금만 회수하고, 원리금 회수 뒤에는 미국이 이익의 90%를 차지한다. 우리로선 제국 시대의 속국처럼 ‘조공’을 바치는 것이나 다름없다. 중국은 중국대로 언제든 한국에 대한 ‘경제적 강압’에 나설 태세다. 미국의 중국 해운·조선업에 대한 무역법 301조 조사 활동에 한화오션 미국 자회사들이 협조했다는 이유로 이 자회사들의 중국 거래를 금지했던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한국의 높은 대중국 경제 의존도를 무기로 삼아, ‘마스가’(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 프로젝트에 경고장을 보낸 것이다.
치열한 패권 다툼 시기를 맞아 강대국들이 자국 우선주의 기치 아래 중견국·약소국을 강탈·강압하는 새로운 국제질서가 펼쳐지고 있다. 트럼프 대외정책의 특징은 흔히 거래주의·일방주의·중상주의로 일컬어지는데 ‘약탈주의’를 추가해야 한다. 19세기 식민지에서 상품·자원·노동력을 약탈했던 제국주의적 속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전략 광물뿐만 아니라 전기차·배터리·태양광 등 첨단산업에서도 지배력을 확대해나가고 있다. 대중국 의존도가 높은 나라는 사실상 경제적으로 ‘종속적’ 지위로 전락하고, 언제든 강압의 위협에 노출될 수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의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함으로써 2차 세계대전 이후 봉인되는가 싶었던 영토 확장주의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 지난 6월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는 강대국들의 전략 경쟁을 거론하며 “신제국주의가 위협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미국의 ‘약탈주의’, 중국의 ‘종속주의’, 러시아의 ‘영토주의’가 맞물리며 세계는 위태로운 길로 내몰리고 있다.
박현 논설위원 hy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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