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우체국 창구에 가보면, 편지봉투 대신 택배 상자를 든 이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집배원이 전하는 우편도 사적인 안부 편지보단 공과금 고지서나 공문서 등기가 된 지 오래다. 우체통에 무언가를 넣어본 기억도 관광지 기념 엽서가 전부고, 봉투에 우표를 붙여본 기억은 친구들 군(軍) 위문편지가 마지막이었다. 근래엔 그마저도 인쇄되어 배부되는 인터넷 편지로 대체됐다, 휴대전화 반입이 허용되면서 거의 잊힌 문화가 됐단다. 기술 변화로 인해 일상에서 개인 간에 편지를 쓰는 일이 사라진 것이다.
우편이 사라진 시대의 우체국에 자리 잡은 건 택배와 금융이다. 전국 물류망을 통한 소포 배송과 공공기관의 공적 신뢰를 기반으로 한 예금·보험 서비스가 우체국의 주업이 된 격이다. 이런 우체국의 변신은 근래 인공지능(AI) 시대의 직업 대체를 걱정하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많은 이가 AI가 기존 일자리를 상당수 소멸시키리라 비관하지만, 실상은 우체국의 사례와 유사하게 직업은 유지하되 직무가 바뀔 개연성이 크다. 기술 변화가 일자리를 줄이기도 하지만 맡는 직무가 달라지는 게 더 현실적인 미래일 수도 있다.
AI 시대일수록 우리는 각자의 직업이 가진 본질이 무엇인지를 더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 만약 우체국이 기관의 본질을 ‘우편 배달’이라는 낡은 직무에 한정했다면, 우체국도 전보처럼 진즉 사라졌을 테다. 그렇지만 전국 물류망과 신뢰성 있는 공공기관이란 본질을 살린 덕에 우체국은 지금도 멀쩡히 성업 중이다. 관성에 따라 몸에 익은 업무를 별생각 없이 반복했다면 결코 맞이하지 못했을 변화다. 기왕 맞이할 기술 충격이라면, 조금이라도 일찍 내 업의 본질을 더 깊게 고민해보자. AI 시대의 핵심 역량은 최신 기술이 아니라, 내가 하는 일을 스스로 규정할 수 있는 능력인지도 모른다.
[박한슬 약사·‘숫자한국’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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