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탈적 대출’ 막겠다는
선의는 이해할 만하지만
팔 비틀어 금리 통제하면
서민 대출 위축되는 역효과
'5분 칼럼' 구독하기
3800여 년 전 고대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에는 대출 이자 규제도 들어 있다. 현무암 석판에 쐐기문자로 새긴 내용을 해석하면, 은(銀) 대출 최고 이자율은 연 20%, 보리 대출은 연 33.33%라고 한다. 비슷한 시기 고대 도시 우르의 점토 서판 연구에 따르면, 은 500g을 연 3.78%에 빌려 제빵소를 짓는 데 썼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윌리엄 괴츠만 예일대 교수의 ‘금융의 역사’). 은과 달리 보리는 가난한 농민이 곡물이 부족할 때 빌려서 수확기에 갚는 방식이라 작황이 안 좋으면 떼일 위험이 컸다. 당시는 시장경제 사회는 아니었지만, 위험도가 높은 대출에 높은 금리를 받는 시장 원리가 반영돼 있었던 것이다.
고대 바빌로니아의 함부라비 법전. 이 법전엔 아자 제한 규제도 있었다. /위키피디아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그런데 이재명 대통령이 이런 ‘떼일 위험이 큰 대출의 금리가 높아서 문제’라는, 시장 원리와는 거꾸로 가자는 말을 계속 던지고 있다. 9월 국무회의에선 “고신용자에게 저리로 장기·고액 대출을 해주면서, 저신용자에겐 고리로 소액·단기 대출을 제공한다”며 “가장 잔인한 영역이 금융 영역 같다”고 했다. 이어 “고신용자의 이자 부담을 늘려 저신용자의 대출 금리를 낮추는 방안을 마련하라”고 했다. 이달 13일 수석 보좌관 회의에서는 “현재 금융 제도는 가난한 사람이 비싼 이자를 강요받는 금융 계급제가 된 것 아니냐”고도 했다.
이 대통령의 말은 취약 계층을 괴롭히는 ‘약탈적 대출’을 막자는 ‘선의(善意)’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약탈적 대출은 감당할 수 없는 조건으로 빌려준 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원리금을 받아낸다. 불법 사금융은 법정 최고 이자율인 연 20%를 넘겨 수수료를 얹고, 심지어 500% 넘는 금리를 요구하기도 한다. 그러니 대통령의 ‘억강부약(抑强扶弱·강자는 누르고 약자는 돕자)’ 취지는 공감할 수 있다.
그래픽=조선디자인랩 김영재 |
그러나 선의로 시작한 정책의 결과가 경제를 왜곡하고 오히려 서민 삶을 옥죈 사례를 수없이 봐왔다. 앞서 문재인 정부만 해도 ‘무조건 임금은 높아야 하고, 금리는 낮아야 한다’는 식의 ‘소득 주도 성장’을 폈더니, 자영업자 삶은 팍팍해졌고 서민은 집값 급등에 ‘내 집 마련’ 기회를 잃었다.
금리는 결국 돈의 가격이다. 금리를 제어하는 건 가격 통제의 일종이다. 경제학 입문서 저자로 널리 알려진 그레고리 맨큐 하버드대 교수는 ‘맨큐의 경제학’에서 “폭격을 빼고는, 도시를 파괴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임대료 통제”라는 말을 꺼내며 선한 의도의 가격 통제가 경제를 어떻게 망칠 수 있는지 설명했다. 임대료 통제는 월세 상승으로 고통받는 저소득층을 보호하자며 정치인들이 주로 꺼내는 정책 메뉴다. 그런데 실제 시행하면 집주인들은 점차 공급을 줄일 것이고, 반면 임차 수요는 점차 늘면서 월세 시장에 만성적 초과 수요가 생길 것이다. 결국 집주인들은 인맥, 학력 등 가격이 아닌 기준으로 원하는 임차인을 골라서 받고, 몰래 뒷돈까지 받으려 한다.
금리 통제도 마찬가지 상황을 부를 것이다. 은행 등은 대출을 깐깐하게 내주면서 서민들은 돈을 빌리기 더 어려워지고, 제도권 밖 ‘약탈적 대출’인 불법 사금융으로 내몰릴 것이다. 엄한 벌을 준다고 쉽게 막힐 일도 아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식의 강한 벌칙이 뒤따랐던 함무라비 법전 시대에도 하루나 한 달 단위로 높은 금리를 매기는 식으로 연간 금리 상한 규제를 우회했다고 한다.
약자를 보호한다며 억지로 금융회사들 팔 비틀어서 시장 원리와 다르게 금리를 통제했다가 서민 대출이 위축되는 역효과를 낳을 수 있다. 애초에 정말 어려운 경제적 약자라면 그에게 돈을 빌려주는 게 아니라 복지 정책으로 감싸는 것이 올바른 접근이다.
[방현철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