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충남 내포로 떠난
겨울 마중 여행
해발 790m의 오서산 정상부에 서면 사방으로 막힘 없이 홍성 남당리 서해바다와 예당평야 등이 펼쳐진다. 택리지 속 "충청도에서 가장 좋다"는 내포다.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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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에 이중환이 펴낸 인문지리서 ‘택리지’ 속 팔도총론엔 “충청도에서 내포가 가장 좋다”고 기록돼 있다. 내포(內浦)는 사전적 의미로 내륙 깊숙이 포구가 형성돼 있는 곳을 의미하지만, 택리지 속 내포는 충청도 지역에서도 가야산 주변에 있는 열 고을을 가리키며, 오늘날 행정구역상 당진·홍성·예산·서산·태안과 더불어 보령·아산의 일부 지역을 아우른다.
서해와 포구, 평야를 곁에 둔 내포는 살기 좋을 뿐 아니라 사시사철 여행하기에도 좋다. 그중 내포 지역의 역사·문화뿐 아니라 생태적 가치가 있는 옛길과 마을 길, 숲길과 하천 길을 연결한 ‘내포문화숲길’만 따라가도 내포의 역사와 인문, 자연을 밀도 있게 만날 수 있다.
◇내포 발아래 두고 해넘이·해맞이 한 번에
내포문화숲길은 총 320㎞의 충남 최장 도보 여행길이다. 가치를 인정받아 2021년 11월엔 국가 숲길로 지정됐다. ‘내포불교순례길’ ‘내포천주교순례길’ ‘백제부흥군길’ ‘내포역사인물길’ ‘내포동학길’ 등 전체 5개 테마가 있다. 각 테마 길은 다시 1~8코스로 나뉜다. 내포문화숲길에 대해 사단법인 내포문화숲길의 문순수 사무처장은 “‘충청도의 역사와 문화’라고 하면 으레 공주·부여부터 떠올리기 쉽지만, 내포는 특히 서민 문화를 간직해 온 곳으로 내포문화숲길은 결국 우리네 이야기와 만나는 길이다. 도보 여행길 중 ‘문화’를 접목한 최초의 길이자 충청도의 역사·문화의 보고(寶庫)로 안내하는 길이기도 하다”고 소개했다.
도보 여행길이기에 걸어야 그 매력을 온전히 느낄 수 있겠지만, 걷기 쉽지 않은 겨울엔 각 테마의 백미로 꼽히는 굵직한 명소를 골라 일부 구간을 걸어보는 것도 방법이다. 역사인물길 2코스에 있는 홍성 ‘백월산’과 백제부흥군길 1코스 연장선에 있는 홍성 ‘오서산’은 연말연시에 아는 사람들만 찾는 해넘이·해맞이 명소. 정상부에선 방향에 따라 일출과 일몰을 모두 조망할 수 있기에 이 시기를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오서산 정상부에 서면 '성연저수지'를 품은 차령산맥 능선이 겹겹이 이어진다. 저수지가 마치 산정호수처럼 보인다.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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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 연안의 산 중에서 가장 높은 해발 790m의 오서산은 차령산맥 끝자락인 금북정맥의 최고봉이다. 코스에 따라 정상까지 최소 40분 이상 산행은 필수다. 백제부흥군길 1코스의 출발점인 ‘오서산 상담마을’ 상담주차장을 시작점으로 삼는 게 널리 알려져 있다. 주차 후 비포장 임도를 따라 오르막길을 6㎞ 정도 걸어 올라야 백제부흥군길의 ‘쉰질바위’에 이른다. 쉰질바위에서 정상석까지는 다시 2㎞ 정도 오르막길이 이어진다. 내포문화숲길 전체 코스 중에서도 난도 ‘상’에 속하는 구간이다. 다만 쉰질바위~정상 코스 등 일부 구간은 15일까지 ‘산불 조심 기간’으로 입산을 통제하니 참고하자. 통제 기간에 구애받지 않고 ‘정암사’에서 1600개의 계단을 통해 정상까지 가는 방법(편도 약 2시간 소요)도 있다. 쉰질바위 부근이나 ‘정암사’ ‘내원사’까지는 임도를 따라 차로 이동이 가능하다. 산은 비경을 아무에게나 허락하지 않는 법. 임도는 길이 좁고 굽이져 운전 난도 역시 ‘상’에 속하고, 일부 구간은 길이 거칠어 놀이공원 어트랙션을 탄 듯한 스릴은 각오해야 한다. 쉰질바위 일대에 주차는 서너 대 정도 가능하나 평일에도 그리 여유롭지 않다는 것도 참고하는 게 좋다. 그럼에도 오서산 정상까지 오르는 이유는 하나, ‘전망’이다. 정상에 올라서면 “오르느라 수고했다”는 듯 서해의 수평선, 가야산과 성주산, 칠갑산 능선이 사방으로 겹겹이 펼쳐진다. 오후 느지막하게 찾으면 수평선에 걸린 겨울 햇살이 내포를 파고드는 눈부신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육·해·공 보상이 확실한 풍광 앞에선 누구나 “힘은 들었지만, 꼭 한번 올라볼 만하다”며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기암괴석과 어우러진 장엄한 능선에 계절을 잊은 억새 물결은 풍경을 거들 뿐. 날씨에 따라 이른 아침엔 운이 좋다면 운해(雲海)도 볼 수 있다. 대신 아찔한 경험을 하지 않으려면 해지기 전 하산은 필수다. 하산 후 차로 10여 분 거리에 있는 ‘광천전통시장’에 가서 따끈따끈한 한우불고기나 어죽, 해장국 한 그릇 하면 차가워진 몸이 스르르 녹아내린다.
◇소원 이뤄주는 수덕사 ‘관음바위’
이응노생가기념관은 애국지사의 흔적을 엮은 내포역사인물길이나 성찰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내포불교순례길과 연결된다. 내포불교순례길 2코스의 ‘수덕사’가 불과 차로 10분 이내 거리에 있다. 해발 495m의 덕숭산 남쪽 자락에 있는 수덕사는 예산 제1경에 꼽힐 만큼 사계절 아름다운 풍경이 가득하다. 일주문 주변엔 철 지난 줄 모르는 듯 빨간 단풍이 남아 손을 흔든다.
수덕사는 '내포문화숲길'에서 '내포불교순례길'의 백미로 꼽히는 곳이다.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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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어난 조형미를 자랑하는 목조 건축물로 꼽히는 예산 수덕사의 '대웅전'.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
수덕사에 대한 창건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나 충렬왕 때인 1308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로 내포 지역의 조계종 사찰을 관장하는 고찰은 규모가 커 볼거리가 풍성하다. 조형미가 뛰어난 목조 건축물인 국보 대웅전과 함께 노사나불 괘불탱, 목조 석가 여래 삼불좌상, 수덕사 삼층석탑 등 불교 유산을 간직하고 있다.
수덕사의 창건설화가 전해지는 '관음바위'. 연말연시를 앞두고 소원을 빌기 위한 발걸음이 이어진다.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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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맘땐 소원을 이뤄준다는 관음바위(소원바위)가 ‘핫플’이다. 대웅전 서쪽 백련당 뒤편에 있는 커다란 바위엔 다녀간 사람들이 소원을 빌며 붙여놓은 동전들이 빼곡하다. 바위 옆 비석엔 ‘관세음보살이 현신(現身)하신 성역’이라는 소개와 함께 ‘수덕사’에 얽힌 소원 바위의 전설이 적혀 있다. 전설에 따르면, 백제 시대 창건된 절은 통일신라 시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번 중창 불사를 했는데, 어느 날 ‘수덕각시’라는 묘령의 여인이 불사를 돕겠다고 나타났고, 이 여인을 보고 반한 ‘정혜’라는 청년이 여인과 결혼하기 위해 불사를 3년 만에 끝냈다. 이후 여인에게 청혼하려하니 여인이 버선 한 짝만 남기고 바위 속으로 사라졌고, 알고 보니 여인은 관세음보살의 현신이었다는 얘기. 이응노 화백이 미술 활동을 했다는 초가집, 이응노 선생 사적지(수덕여관), ‘선미술관’까지 차례로 둘러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내포역사인물길'에 있는 '만해문학체험관'에선 60여 점의 전시물을 통해 한용운의 생애를 살펴볼 수 있다.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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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한용운 생가터와 민족시비공원 등이 복원·조성돼 있다.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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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노 생가 기념관은 ‘내포역사인물길’ 코스 중 하나다. 독립운동가 윤봉길 의사 사당인 ‘충의사’, ‘만해 한용운 생가지’ ‘김좌진 장군 생가지’ ‘최영 장군 사당’ ‘성삼문 선생 유허지’ 등과 함께 코스를 이룬다. ‘님의 침묵’ 탈고 100주년인 해이니 만해 한용운 생가지는 일부러 찾아가볼 일이다. 생가터 자리에 생가, 만해사, 만해문학체험관, 민족시비공원 등을 복원·조성해놓았다. 60여 점의 전시물을 갖춘 만해문학체험관 한쪽에선 ‘만해 한용운의 얼굴’전이 기다린다. 승려이자 독립운동가, 시인이기도 했던 그의 행보에 따라 인생사가 묻어나는 얼굴 사진과 초상화에 유독 시선이 오래도록 머문다.
◇천주교 순례 코스 일번지 ‘솔뫼성지’
내포를 이야기할 때 불교순례길뿐 아니라 천주교순례길도 빼놓을 수 없다. 내포에서도 북부 지역인 당진시 ‘솔뫼성지’는 내포천주교순례길 코스의 출발점이자 성지 순례 일번지로 치는 곳이다. 소나무 산이라는 뜻의 우리말인 ‘솔뫼’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1821~1846, 이하 김대건 신부)가 탄생한 곳이다. 김대건 신부가 천주교 박해를 피해 용인 ‘골배마실’(현 용인시 ‘은이성지’ 일대)로 이사 가기 전인 일곱 살 무렵까지 살았던 생가 일대를 성지로 조성해 놓았다. 김대건 신부 증조부부터 시작돼 4대에 걸친 순교의 역사가 깃든 성지에 들어서면 솔뫼란 이름처럼 울창한 소나무 숲부터 눈에 들어온다. 김대건 신부 순교 100주년인 1946년에 순교 기념비를 세우면서 조성한 숲이다. 소나무 숲 산책로를 사이에 두고 김대건 신부 생가, 광장 겸 야외 미사 및 행사 장소로 쓰이는 ‘솔뫼 아레나’ ‘김대건 신부 기념관’ ‘천주교 대전교구 역사관’ ‘성모 경당’ 등이 들어서 있다.
소나무가 우거진 '솔뫼'에 자리한 김대건 신부 동상. 솔뫼성지는 '내포천주교순례길'뿐 아니라 교황도 다녀간 천주교 순례 일번지로 꼽힌다.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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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뫼성지 '김대건 기념관' 안쪽에 홀로 기도와 묵상을 할 수 있도록 마련한 공간. 스테인드글라스와 조명이 어우러져 성스러움이 느껴진다.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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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가을에 새 단장을 거쳐 재개관한 김대건 신부 기념관에 들어서면 김대건 신부 흉상이 눈에 띈다. 김대건 신부 흉상은 가톨릭대 해부학 교실 팀이 김대건 신부의 유골을 바탕으로 얼굴을 복원해 낸 특별한 전시품. 김대건 신부 유해인 뼛조각에 대한 과학적 분석을 통해 뼈대를 제작한 뒤 19세기 당시 조선 남성의 얼굴 윤곽에 맞춰 만들었다. 김대건 신부가 직접 만든 조선전도(원본은 프랑스국립도서관 소장)엔 우리나라 지명이 뚜렷하다. 기념관 안쪽 기도 공간에선 조용히 홀로 찾아 기도나 묵상이 가능하다. 기념관 내부는 수장고 형태로 성물을 전시해 놓아 편히 둘러볼 수 있다. 대성당은 솔뫼성지에 방점을 찍는 공간이다. 2021년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을 기념해 개관한 대성당 내부로 들어서면 신비로운 빛을 뿜어내는 압도적인 스테인드글라스와 마주한다. 성스럽고 경건한 분위기에 저절로 숨죽이게 된다. 솔뫼성지는 설경이 특히 아름답기로 유명하니 눈 내린 날을 기약하고 발걸음을 돌려본다. 내포천주교순례길은 솔뫼성지를 중심으로 합덕성당, 여사울성지, 신리성지, 삽교성당, 배나드리성지 등과도 이어진다.
전통문화체험 테마파크로 꾸며놓은 '내포보부상촌'에선 내포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보부상들의 이야기가 기다린다. 보부상 체험도 해볼 수 있다.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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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짧은 겨울에 서울·경기권에서 당일치기로 내포 여행을 계획한다면 북쪽인 당진 솔뫼성지부터 시작해 수덕사, 만해 한용운 생가지, 백월산이나 오서산 등을 거쳐 남당항이나 궁리항, 궁평항 등에서 일몰을 감상하며 여행에 마침표를 찍는 게 비교적 동선을 절약하며 알차게 여행하는 방법이다. 오가는 길에 전통문화 체험 테마파크인 ‘내포보부상촌’ 등이 깨알같이 숨어 있어 코스에 추가해 볼 만하다.
다시 서쪽 수평선 아래로 해가 떨어지고 어둠이 등 떠밀지만, 바닷가 식당마다 제철을 알리는 굴 향이 발걸음을 붙잡으니 주저앉기 쉽다. 겨울에도 내포가 좋은 이유다.
[박근희여행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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