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광해 칼럼니스트·전 국제통화기금 대리이사 |
35년 전 생애 최초로 선진국인 영국 땅을 밟았다. 어딜 가건 참 조용한 곳이었다. 당시만 해도 다방이나 술집에서 왁자지껄하게 웃고 떠들어도 그리 큰 흠이 되지 않던 우리나라였다. 심지어 기분 좋으면 술집에서 노래도 불렀다. 영국에선 커피숍에서 커피도 홀짝거리면서 마셨고, 옆 사람과의 대화도 저렇게 얘기해서 들릴까 싶을 만큼 나지막하고 은밀했다. 빵빵거리는 차를 보기 어려웠고, 아래층 사는 할아버지는 늦은 시간에 화장실 물 내리는 소리가 시끄럽다며 불평했다.
더욱 놀라웠던 사실은 선거를 조용하게 치른다는 것이었다. 1992년 4월 영국은 총선의 열기에 휩싸여 있었다. 존 메이저 수상이 이끄는 보수당은 여론조사에서 노동당에 비해 열세였고 많은 전문가들이 노동당의 집권을 예상했다. 보수당은 반전을 노리고 노동당은 승기를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선거전은 나날이 격렬해지고 있었다. TV에서는 선거 관련 보도가 대부분이었고, 양당 후보들의 거친 입씨름을 보는 것이 일과였다. 놀랍게도 거리는 평온하기만 했다. 그 흔한 선거 벽보 한 장 보기 힘들었고, 유세한다고 거리를 시끄럽게 하는 일도 없었다. 열기는 신문과 TV 속에만 있었다.
프랑스와 미국 근무 시절 경험한 2001년 프랑스와 2017년 미국의 대통령 선거도 마찬가지였다. 언론에서는 후보 간의 토론과 공방으로 열기가 뜨거웠지만 시민들의 일상은 조용하고 차분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친이스라엘 정책을 반대하는 중동 사람들의 시위도 피켓을 들고 행진하는 것이 전부였다.
지금 대한민국은 35년 전 영국 땅을 밟았을 때만큼 조용해졌다. 교통 소음도 크게 줄었고, 방음벽에 둘러싸인 공사장도 침묵에 가깝다. 길거리나 혹은 카페에서도 옆 사람에게 폐가 되는 것을 의식하는 일이 일상이 됐다. 지나가는 외국인이 큰소리로 떠들면 후진국에서 왔나 생각할 정도가 됐다. 층간 소음으로 인한 갈등이 커진 것도 차분한 일상에 대한 갈증이 심해졌다는 방증이다. 개도국 사람은 선진국이라 다르다고 생각할 것이다.
물론 내년 지방선거가 시작되면 나의 이런 생각을 비웃듯 대한민국은 다시 옛날로 회귀할 것이 분명하다. 후보와 선거운동원들은 확성기를 매단 차로 거리를 누비면서 구호를 외칠 것이다. 정당들은 지지자를 대거 동원하는 대중 집회에 사활을 걸 것이다. 마이크를 사용한 연설로 모자라 쉴 새 없이 음악을 틀고 북과 꽹과리까지 합세할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격화되고 있는 진영 대립으로 시민단체나 노조가 주도하는 시위와 집회가 대한민국의 데시벨을 증폭시킬 것이다.
군사 독재 시절 표현의 자유를 억압당했고, 크게 외치는 것밖에는 저항 수단이 없었기에 묵인되던 일이었다. 우리의 과거를 알 리 없는 외국인들은 신기한 듯 쳐다보겠지만 대한민국은 아직 멀었구나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2026년은 병오(丙午)년이다. 천간의 병과 지지의 오가 모두 오행으로는 화(火)의 기운이다. 화는 강렬한 젊음을 상징하지만 주역에서는 분별과 예절을 의미하는 기운이기도 하다. 병오년을 맞이하여 선거운동이나 대중 집회도 열기는 간직하되 시민의 생활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변해야 한다. 출발점은 옥외 집회에서는 확성기 사용을 금지하는 일이다. 소음 허용 기준을 강화해온 것은 사실이지만 변화된 의식 수준에 맞추려면 아예 못 쓰도록 해야 한다. 선진국처럼 피켓 사용만 허용하더라도 수준 높은 우리 국민은 알 것은 다 알 것이기 때문이다. 절대다수 의석을 가지고 있고 동원 능력에서 앞서는 여당이 입법을 주도한다면 살신성인의 자세로서 높은 평가를 받을 것이다.
[최광해 칼럼니스트·전 국제통화기금 대리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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