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임사에 ‘민주주의’ 가장 많이 쓴 전두환
레토릭은 종종 현실의 역설을 드러낸다
김대중·노무현도 말과 다른 행동 비판받아
이재명 정권에서 못이 박히게 들은 ‘내란’
실체 없는 유령 같은 단어에 나라가 들썩
칼 포퍼가 경고한 ‘닫힌 사회’ 될까 두려워
일러스트=이철원 |
퀴즈 하나. 다음 중 취임사에서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가장 많이 사용한 대통령은? ⓵김영삼 ⓶김대중 ⓷전두환 ⓸노무현.
정답은 ⓷번, 전두환 대통령이다. 1980년 통일주체국민회의 간선을 통해 제11대 대통령에 선출된 전두환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민주주의’를 무려 22번 사용했다. 연설문만 보면 그가 최초의 문민 대통령 같다. 그의 뒤를 이은 노태우 대통령 역시 ‘민주주의’를 21번 언급해, 두 사람이 민주주의를 자주 언급한 대통령으로 기록돼 있다. ‘민주 투사’ 출신 김영삼 대통령은 민주주의를 6번, 김대중 대통령은 11번 언급했으며, 노무현 대통령은 3번 언급하는 데 그쳤다.
레토릭은 종종 현실의 역설을 드러낸다. 사람들은 말을 통해 아직 실현되지 않은 희망이나 약점을 보완하려 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이재명 대통령도 계엄 1주년 연설에서 가장 정의롭지 못한 정권이 ‘정의’라는 말을 사용했다며, 전두환 정권의 ‘정의사회구현’을 예로 들었다. 맞는 말이다. 전두환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권력을 이용하여 수십억 또는 수백억 원의 재산을 긁어모은 정치인이 있고” 운운했고, 김대중 대통령은 “다시는 무슨 지역 정권이니 무슨 도(道) 차별이니 하는 말이 없도록 하겠다”고 했으며, 노무현 대통령은 “소득 격차를 비롯한 계층 간 격차를 좁히기 위해... 개선을 강구하겠다”고 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훗날 수백억 원대 비자금 혐의로 법정에 섰고, 김대중 대통령은 자신의 아들에게 ‘무슨 도’ 국회의원 공천을 주었으며, 노무현 대통령은 임기 내내 사회 양극화로 비판받았다.
같은 잣대로 이재명 정권 들어 귀에 못이 박히게 들은 단어는 ‘내란’이다. 취임사부터 ‘내란 재발 방지’를 말한 대통령은 “내란 청산에 신상필벌은 기본”이라며 내년 2월까지 모든 부처 공무원의 내란 가담 여부를 조사하기로 했다. 총리실과 각 부처에 ‘내란행위제보센터’를 두는 등 49개 중앙행정기관에 661명을 투입해 공무원 75만명을 조사하고 휴대전화까지 들여다보겠다고 한다. 또 국무회의에서 “국가 권력 범죄는 나치 전범을 처리하듯이 영원히, 살아 있는 한 처벌하고... 국가 폭력 범죄의 공소시효를 폐지하는 특례법 입법에 속도를 내달라”고 주문하기도 했다. 계엄 1주년을 맞은 시점에도 “빛의 혁명은 끝나지 않았고 내란 사태는 현재도 진행 중”이라며 내란 청산을 “몸속 깊숙이 박힌 치명적인 암을 제거하는 것”에 빗댔다.
대통령은 ‘입법부’라고 하지만 사실상 여당 단독으로 내란 특검에 이어 내란 전담 재판부 신설을 추진하고 있다. 당대표에 따르면 2차 종합 특검에서는 법원도 수사 대상이 될 것이라고 한다. 사법 개혁을 명분으로 법 왜곡죄와 헌법재판소법도 만들 기세다. 전국법원장회의에 모인 법원장들은 내란 전담 재판부와 판사 처벌법에 대해 위헌성이 크다는 우려를 표했다.
취임 6개월 메시지로 대통령실은 “내란으로 무너진 일상 회복”을 말하지만,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느끼건대 나의 일상은 하나도 무너지지 않았다. “내란은 현재 진행 중”이라는 대통령의 말에도 동의하기 어렵다. 한 사람의 그릇된 판단에 따른 계엄이 있었고, 자고 일어나니 그 계엄이 해제되었고, 그 사람은 지금 감옥에 있다. 새로 선거가 열려 대통령이 바뀌었다. 그 몇 시간 안에 무슨 일상이 무너졌으며, 측근도 몰랐다는 계엄 선언에 공무원 75만명이 무슨 수로 가담할 수 있었겠는가. 실체도 없는 유령 같은 단어에 온 나라가 들썩이는 꼴이다. 무엇보다 이런 그림을 끌고 나가는 건 대통령과 여당이다.
‘내란’이 무슨 뜻인지 새삼 궁금해졌다. 네이버 어학사전에 물어보니 ‘명사: 나라 안에서 정권을 차지할 목적으로 벌어지는 큰 싸움’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맞다. 그러니 ‘내란’이라고 불리는 행위들은 옳음을 세우기 위함이 아니라 위력을 과시하는 행위이고, 사법 정의나 개혁 같은, 옳음의 편에서 바로잡겠다는 것이 아니라 누가 더 힘이 센지를 겨루는 투쟁에 불과하다. 그런 투쟁은 종종 정의의 가면을 쓰고 나타나 사람을 헷갈리게 한다. 야당은 힘이 없으면 정의 편에라도 서야 할 텐데, 이런 중대한 권력 놀음을 ‘내란몰이’라는 유약한 레토릭으로 대응하고 있다. ‘내란몰이’라는 말을 쓰는 순간, 스스로 내란 프레임에 갇힌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다. 아무리 저항해도 그 정도 수준의 상황 인식과 레토릭으로는 사냥꾼에 쫓기는 토끼 신세를 벗어나지 못한다.
사실 야당보다 더 걱정되는 건 따로 있다. 지금 대통령과 여당은 세상 끝까지 내란 청산을 하려 할 것이다. 대통령은 “내란은 꿈도 꾸지 못하게 하겠다”고 말했고, 당대표는 “내란 티끌까지 법적으로 처벌하겠다”고 했다. 이른바 ‘내란’이 청산된 후, 그 끝에는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처럼 생각조차 미리 알아내 처벌하는 미래형 국가? 아니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기 위해 ‘싹이 나기도 전에 잘라버리는(nip it in the bud)’ 17세기 유럽? 아니면 칼 포퍼가 일찍이 경고한 ‘닫힌 사회’? 그것이 무엇이든, 상상조차 하기 싫다. 어느 정도 혼란을 품고 정상적으로 가동되는 게 민주사회다. 그런 혼란조차 용인하지 않겠다는 의지와 그러고도 남을 힘을 생각하면, 나는 모골이 송연하다. 그 무시무시한 결말을 야당이, 사법부가, 그리고 국민은 얼마나 짐작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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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희 이화여대 커뮤니케이션미디어학부 교수·한국미래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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