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2.13 (토)

    [유석재의 돌발史전 2.0] 지금 우리에게 ‘박정희’는 무엇인가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독재자’의 리더십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역사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입니다. 뉴스의 홍수 속에서 한 줄기 역사의 단면이 드러나는 지점을 잡아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지난 2018년부터 조선일보 신문 지면과 조선닷컴을 통해 연재된 ‘유석재의 돌발史전’은 이런 문구를 내걸고 지난 8월 말까지 계속됐습니다. 잠시 휴지기를 가졌던 ‘돌발史전’이 시즌2로 새롭게 돌아왔습니다. 예전처럼 금요일 아침에, 보다 깊고 정제된 글로 찾아뵙겠습니다.

    ==========

    조선일보

    지방의 공사 현장을 시찰하며 지시하는 박정희 대통령. /기파랑


    유신 시기 나는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다. 교무실마다 박정희 대통령의 사진이 걸려 있던 그 당시 대통령은 절대자와도 같았다. 주변 어른 중 아무도 그에 대해서 험한 말을 하지 않았고 그게 당연하다고 여겨졌다. 아직은 아이들 중 일부에게만 익숙했던 단어인 ‘유신’은 ‘나라를 더욱 잘살게 만들기 위한’ 특단의 조치인 것으로 알아야 했다.

    그러다 10·26이 났다. 어린 나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훨씬 나중에서야 임금이 죽은 것을 천붕(天崩)이라 한다는 것을 알고는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정말 슬펐던 것은, 내가 타고 있던 안전하다고 여겼던 9톤 트럭과도 같은 견고한 체제에 교통사고가 발생했다는 생각에서였을 것이다. 그 체제는 이미 균열이 생겨 예전 같지 않았다.

    그런데 며칠 지나자 주변 어른들의 움직임이 뭔가 이상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듯이 조금씩 박정희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동안은 언론의 자유가 없었다는 말도 했다. 어린이신문에는 교과서에서 유신을 줄이거나 빼기로 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나는 그동안 속았던 것인가? 어른들이 비겁했던 것인가? 아니, 박정희는 영웅이었나 악인이었나? 도대체 내가 살아온 시대는 뭐였나? 내 입장에서 분명한 것은 어린이로서 살기에 유신 시대는 그다지 나쁜 시대는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그 이후 5공은 청소년으로서 살기에는 무척 힘든 시대였지만.

    대체로 1980년대 말과 90년대에 대학을 다닌 내 연령대 사람들의 정서는 이렇다. 유년 시절에 해당하는 유신 시대에 대한 기억은 나쁘지 않다. 하지만 대학에 들어간 이후 박정희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커졌다. 그러나 적어도 박정희는 전두환처럼 ‘우리가 직접 핍박을 당했다’고 여길 권력자는 아니었다. 극단적인 숭배부터 배척까지 스펙트럼은 넓지만 적어도 박정희에 대한 직접적인 반감은 전두환보다는 훨씬 덜하다.

    지금 돌이켜보면 더 놀라운 것이 있다. 10·26이 일어난 지 반세기 가까이 지났는데도, 박정희를 평가하고 자리매김하는 데서 드러나는 당혹감과 불편함, 다시 말해 여전히 박정희를 제대로 평가하기 어렵다는 어색함이 10·26 직후와 별로 다를 게 없다는 점이다.

    광복절이 되면 한국 근현대사의 ‘위인’들로 김구·안중근·유관순·윤봉길을 선양하는 데 별로 어려움이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이승만은? 그리고 박정희는? 여전히 불편한 존재다. 하지만 전두환처럼 거의 확실한 악인으로 규정하기엔 대체로 그 공(功)이 너무 크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정리하자면 ‘박정희를 선양하거나 긍정적으로 평가하면 극우’가 되고 ‘박정희를 비난하거나 부정적으로 평가하면 진보·좌파’가 된다. 중간은 없다.

    하지만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 한국인의 정치적·역사적 의식 속에서 박정희는 대단히 큰 위치를 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2024년 3월 22일부터 4월 5일까지 한국갤럽은 전국 만 13세 이상 남녀 1777명을 대상으로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대통령’이 누군지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1위가 31%를 차지한 노무현, 2위는 24%를 차지한 박정희였다(노태우는 0.4%로 10위였다). 이것은 놀라운 수치였다. 응답자의 상당수는 노무현 시대를 살았던 반면 박정희는 책으로만 접한 세대였는데도 4분의 1 가까운 사람들이 박정희를 소환한 것이다.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수도 있지만, 박정희가 집권한 1961년부터 사망한 1979년 사이 한국 사회는 근본적인 변화를 겪었다. 1인당 국민소득은 89달러에서 1589달러로 18배 가까이 늘었고, 수출액은 4200만달러에서 150억6000만달러로 약 360배 늘었다. 1960년대 초에는 상상도 못 했던 중화학공업이 육성되고 새마을운동이 펼쳐지는 가운데 하루 세 끼를 먹지 못하고 굶는 사람이 사라졌고, 고속도로가 놓였으며, 민둥산에 산림 녹화가 실현됐고, 의료보험의 토대가 마련됐다.

    박정희를 싫어하던 내 지인 중 한 명은 아프리카에 봉사 활동을 다녀온 뒤에야 박정희를 존경하게 됐다고 털어놨다. 열악한 경제적·사회적 시스템 속에서 살아가다가, 만약 어느 날 한 지도자가 나타나 산업화를 이루고 국민을 잘살게 하는 업적을 이뤘다면, 그 국민은 그 지도자(또는 독재자)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박정희는 위대한 인물이었다는 생각이 비로소 들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윤 어게인’이 공허한 말인 것 이상으로 ‘박 어게인’은 성립할 수 없는 말이다. 혹자는 박정희 전기를 쓰면서 서문에 ‘언제고 이 땅에 나타날 제2의 박정희가 이 책을 읽었으면 한다’는 바람을 썼지만, 역사는 반복되지 않는다. 초헌법적 조치인 1972년의 유신은 두 번 다시 역사에 나타날 수 없다. 어쩌면 ‘박정희’라는 존재가 절실히 필요했을 역사의 단계에 꼭 맞춰 나타난 것인지도 모른다. 박정희의 재임 연도(1963~1979)와 필리핀의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의 재임 연도(1965~1986)는 대부분 겹친다. 만약 한국에 마르코스가, 필리핀에 박정희가 있었더라면 두 나라의 운명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어떤 특성이 박정희라는 독특한 지도자(혹은 정치인이나 독재자)를 출현시킬 수 있었는가’라는 데 조금 더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을 것 같다. 5·16 이전 박정희에 대해 ‘카리스마적 지휘관’이 아니라 ‘참모형 기획가’였다는 분석이 있다.(오인환 ‘박정희의 시간들’)

    좀 더 이 분석을 파고들면, 박정희는 야전 사령관 출신도 아니었고, 전두환처럼 한 조직의 우두머리도 아니었다는 점을 의외로 많은 사람이 놓치고 있었다. 한마디로 박정희의 리더십은 각고(刻苦)의 노력으로 이룬 것이라 할 수 있다. 박정희의 본질은 ‘기획가’였다. 그는 기획력이 특출한 작전참모로서 두각을 드러낸 인물이었고, 계획에서 실행과 사후 평가까지 철저하게 진행했다. 큰일을 추진하면서도 작은 일을 챙기는 데 소홀함이 없었던 통치술을 이미 군에서 익힐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기획력이 마침내 쿠데타의 성공으로까지 이어졌다. 기획이 곧 혁명이었다.

    이 분석은 이렇게 이어진다. 사령관에게는 전쟁터를 넓게 보는 매의 눈과 병사들의 사기를 올리는 맹수와 같은 심장이 필요하다. 상황에 따르는 그때그때의 판단력과 장악력도 좋아야 한다. 군에서 예하 부대 지휘관, 참모, 참모장, 사령관이라는 네 가지 역할을 두루 잘한 인물도 흔치 않은데, 박정희는 그 통합적 능력을 갖춘 사람이었다.

    5·16 이후에도 박정희의 리더십은 단계적으로 형성돼 나갔다. 혁명 주체 세력 중에서도 군 선배가 있었고, 김종필의 공화당이 100% 충성하는 것도 아니었다. 박정희는 여기서 ‘시스템 정치’로 용인술과 지모를 강화하는 방안을 익혔다. 이후락의 청와대 비서실과 김형욱의 중앙정보부를 서로 경쟁하고 견제하게 하며 입지를 강화했다(이 지모를 혈육에게 물려주지 못한 것이 훗날 보수의 1차 궤멸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경제에 문외한이었던 박정희는 자기 주도적 학습 능력을 통해 끊임없이 노력하며 단기간에 경제의 본질을 배웠다. 매일 3시간씩 대학 교수에게 1대1 강습을 받았고, 수출진흥확대회의를 열어 찬반 토론을 경청한 뒤 결론을 내렸다. 계획을 세우면 추진하고 나서 반드시 사후 평가를 했다. 유연한 정신 자세, 겸손, 사심(私心)이 적은 태도도 여기에 한몫했다. 그 결과는 단기간에 경제 성장을 달성한 ‘한강의 기적’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 모든 리더십은 1972년 유신 선포를 넘어 1974년 육영수 여사 서거 무렵부터 제대로 작동하지 않게 됐다. 자기 주도 학습 기능은 멈췄고 특유의 자기 수정(修正) 능력은 둔화됐다. 기획가로서 출구 전략을 만들었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고도 성장이 한계를 드러내면서 경제 안정화 정책을 받아들였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박정희 개인의 문란한 사생활이 도덕성과 지도력의 위기를 불렀고, 말년엔 경호실장 차지철의 독주를 막지 못하면서 용인술마저 실패했다. 10·26은 그 결과였다.

    박정희의 리더십은 결국 귀감인 동시에 반면교사이기도 했다. 그러나 집권 초기의 먼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력은 지금도 사람들을 감탄하게 하는 데가 있다. 1965년 6월 한일협정 비준 직전 그는 특별 담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들(한일협정 반대파)은 어찌하여 그처럼 자신이 없고 피해 의식과 열등감에 사로잡혀서 일본이라면 무조건 겁을 집어먹느냐 하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제는 대등한 위치에서 오히려 우리가 앞장서서 그들을 이끌고 나가겠다는 우월감은 왜 가져보지 못하는 것입니까?” 그때는 비현실적이고 말도 안 되는 담화라고 생각했을 사람들도 지금 읽어보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조선일보

    ▶‘유석재의 돌발史전’은

    역사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입니다. 뉴스의 홍수 속에서 한 줄기 역사의 단면이 드러나는 지점을 잡아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매주 금요일 아침 여러분을 찾아뵙겠습니다. 아래 얼굴사진 오른쪽 ‘구독+’를 한번 눌러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뉴스의 홍수 속에서 한 줄기 역사의 단면이 드러나는 지점을 잡아 설명해드립니다.

    돌발史전 구독하기

    [유석재 역사문화전문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