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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마늘쪽같이 생긴 고향의 소녀와
한여름을 알몸으로 사는 고향의 소년과
같이 낯이 설어도 사랑스러운 들길이
있다
그 길에 아지랑이가 피듯 태양이 타듯
제비가 날듯 길을 따라 물이 흐르듯 그렇게
그렇게
천연히
울타리 밖에도 화초를 심는 마을이 있다
오래오래 잔광이 부신 마을이 있다
밤이면 더 많이 별이 뜨는 마을이 있다
―박용래(1925∼1980)
생각이 번잡해 시골 오솔길 같은 곳에 혼자 숨고 싶을 때 박용래 시를 읽는다. 나귀 갈기처럼 가지런히 놓인 시어를 보면 삿된 마음이 벗겨지는 기분이 든다. 그는 최소한의 언어로 깊은 여운을 끌어내는 시인이다. 평소 울보 시인이라 불릴 정도로 눈물이 많았다는데, 시에서는 늘 염결하고 절제된 언어를 고집했다. 쉼표 하나, 글자 하나하나를 옥석 고르듯 심혈을 기울여 선택했다.
2연 마지막 행의 “천연히”라는 부사를 보자. “생긴 그대로 조금도 구별 없이 자연스럽게”라는 뜻이다. 명사나 동사도 아닌 부사 하나를 한 행으로 놓아두는 솜씨라니. 시인들이 연과 행을 나누는 까닭은 말의 리듬이나 시를 지배하는 음악적 요소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말이 종이 위에서 ‘중요하게 존재하기’를 바라서이기도 하다.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 사이에 휴지기를 두어 언어를 허공에서 얼려 버리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그곳은 어디일까? “오래오래 잔광이 부신 마을”, 밤이면 더 많은 별이 뜨고 “머리가 마늘쪽같이 생긴” 고향의 소녀가 있고 한여름을 알몸으로 사는 고향의 소년이 있는 곳. 시인은 분명히 “있다” 하지만 더 이상 갈 수 없는 곳일지도 모른다. 그곳에서 사흘만 아랫목에 배를 지지며 텅 빈 마당을 구경하다 왔으면 좋겠다. 천연히. 내 생김을 꾸미지 않고 그저 놓아두어도 충분한 곳에서.
박연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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