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사진전]
188. 어니스트 섀클턴
리더십의 교본
가장 위대한 실패자
인듀어런스호의 마지막 순간(일부 확대), 1916, 미국 의회 도서관 [언더우드 앤 언더우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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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후암동 미술관은 무한한 디지털 공간에 걸맞은 초장편 문화예술 스토리텔링 연재물의 ‘원조 맛집’입니다. ■기자 구독■을 누르시면 매 주말 새로운 예술 이야기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기사는 역사적 사실 기반에 일부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으로 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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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 바다, 표류 시작되다
인듀어런스호, 1915, 프랭크 헐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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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미칠 노릇이었다.
영국 탐험가 어니스트 섀클턴과 스물일곱 명 대원을 태운 배, 인듀어런스호. 남극 횡단의 사명을 실은 녀석이 크게 휘청였다. 선체는 남극 대륙 앞 웨델해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갑자기 불어온 찬바람, 아울러 사방에서 달라붙는 유빙(流氷) 때문이었다. 지금껏 한 시간에 25㎞를 달렸던 인듀어런스호는 어느덧 종일 힘을 써도 겨우 50㎞만 갈 수 있을 뿐이었다. 그나마 잠시 남극 대륙의 형상이 보인 적이 있었다. 하지만, 배가 통째로 얼음덩어리에 쓸려 흘러가는 통에 또 멀어지고 말았다. 이때가 1915년 1월 20일께였다. 섀클턴도, 대원들도 몰랐다. 이날부터 이들 모두가 사상 초유의 조난 생활을 하리라곤.
그곳이 아무리 변화무쌍한 땅이라고 하지만, 이건 도를 넘은 것 같았다. 탐험대장 섀클턴은 베테랑이었다. 그는 앞서 두 번이나 남극을 탐험했다. 그중 한 번은 당시 기준으로 최남단(남위 88° 23′)에도 도달했었다. 그런데, 그런 그조차도 지금의 돌발 상황은 예측하지 못했다. 이렇게 갑자기 온 바다가 얼음장이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섀클턴은 이때부터 남극 횡단이란 임무를 지웠다. 새로운 목표를 썼다. 그것은 전원 무사 귀환이었다. 이는 그만큼 상황이 좋지 않다는 뜻이기도 했다.
구멍난 배, 밀려오는 얼음
어니스트 섀클턴과 프랭크 워슬리가 인듀어런스호 주변 얼음이 깨지는 모습을 보고 있다. 뉴사우스웨일스 주립 도서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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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 달여가 흐른 2월 말. 탐험대와 배는 여전히 얼음 바다 위에 갇혀 있었다.
어느덧 10월.
날이 차츰 풀렸다. 배를 꽉 물었던 유빙도 조금씩 녹았다. 그런데, 유빙은 혼자 죽지 않았다. 갈라지고, 떨어지는 과정 중 선체를 거듭 긁고 때렸다. 10월 24일.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다. 배에 구멍이 나고 만 것이다. 쏟아지는 얼음은 선실을 제집처럼 휘저었다. 배 후미는 벌써 6m 가까이 기우는 모습이었다.
…얼음 하나가 (…)키를 망가뜨렸다.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었다. 당시 항해일지에 쓰인 글이었다.
9개월만에…‘배를 버리다’
얼음덩어리 사이에 낀 인듀어런스호, 1915, 미국 의회 도서관 [언더우드 앤 언더우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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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가라앉는다! 섀클턴이 외쳤다.
그의 결정은 빠르고 간결했다. 인듀어런스호를 버리자. 이름 그대로 ‘참을성(endurance)’ 있게 버텼지만, 더는 붙들고 있을 수 없다는 판단이었다.
저기에 계속 있었다면….
간담이 서늘해지는 순간이었다. 섀클턴 일행은 육지를 찾아 헤맸다. 눈보라는 지겹게 몰아쳤다. 하루에 간 거리는 고작 1.6㎞. 이대로는 안 될 일이었다.
계획을 또 재빨리 바꿨다.
그나마 평평한 빙반 위 천막을 쳤다. 이름은 ‘페이션스(patience·인내심)’라고 지었다. 어쨌건 이 얼음판도 바다 위에 둥실 떠 있는 만큼, 어디로든 흘러가기는 할 것이다. 모든 이는 발밑의 그 얼음 섬이 402㎞ 가량 떨어진 폴렛섬으로 가길 바랐다. 그곳은 인간 손을 탄, 최소한의 물자가 남아있는 땅이었다. 하지만…. 1916년, 4월 15일. 그러니까, 배에서 나오고도 또 반년 가까이 빙반에서 방황한 시기. 얼음섬이 바짝 붙은 곳은 폴렛섬이 아닌 엘리펀트섬이었다. 코끼리 코를 닮은 이 섬은 황량한 땅이었다.
남극 탐험사상 가장 처절한 생존기는 아직 반환점도 돌지 못했다. 섀클턴과 대원들은 앞으로 더 자주, 더 크게 울고 흐느껴야 했다.
“최악 조건, 사람 찾습니다”
레지널드 이브스, 어니스트 섀클턴, 1921, 캔버스에 유채, 61x50.8cm, 영국 국립 초상화 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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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거슬러 1913년, 12월. 조난은커녕 출항도 하지 않았던 시점.
섀클턴은 인류 첫 남극 대륙 횡단을 목표로 대원을 모았다. 그때만 해도 당연히 알지 못했다. 머지않은 미래, 본인이 어떠한 재앙을 겪을지. 뜻을 굳힌 섀클턴은 곧장 적은 보수와 극악 환경, 그러나 성공하면 영광을 얻는다는 ‘낭만적’ 광고를 냈다는 설이 있다. 5000여명이 이를 보고 참여 의사를 보였다는 말도 있다.
하지만, 이런 광고 기록 자체가 남아있지 않기에 신빙성은 높지 않다.
당시 섀클턴은 서른아홉 살의 잔뼈 굵은 모험가였다. 광고보다는, 어느 정도는 알음알음으로 지원서를 받았을 가능성도 크다.
‘남극 횡단’ 드림팀 꾸리다
인듀어런스호에 탔던 탐험대의 사진, 1920, 프랭크 헐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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섀클턴은 본인과 함께 인듀어런스호에 탈 인원을 직접 뽑았다.
항해사와 기관사를 포함, 목수, 의사, 요리사, 사진가, 과학자 등. 이렇게 스물여섯을 뽑아 인듀어런스호 탑승권을 줬다. 섀클턴은 면접 중 몇몇에겐 뜬금없이 노래를 시켰다. ‘대장’ 말을 잘 듣는지, 긍정적 태도를 갖췄는지 시험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가운데, 면접을 보지 않고서 몰래 탄 추가 인원. 밀항자도 한 명 있었다. 이름은 퍼스 블랙보로. 나이는 열아홉이었다. 다만, 배짱이 있어 이례적으로(!) 그 또한 동료가 될 수 있었다. 그래서 탐험대는 섀클턴과 스물여섯 대원이 아니라, 스물일곱의 대원이 된 것이었다.
여기서 여담이 있다면 역시나 섀클턴과 밀항 소년 사이에 벌어진 일일 것이다.
얼마나 오래 걸릴지 알 수 없는 모험길. 섀클턴은 변수를 줄여야 했다. 하지만, ‘먹는 입’이 늘어나는 건 외려 치명적 악재가 하나 생기는 일이었다. 극도로 화가 난 섀클턴은 소년에게 “식량이 떨어지면 가장 먼저 너부터 잡아먹겠다”고 몰아세웠다. 그러자 소년은 “저보다는 대장님이 먹을 게 더 많아보인다”고 받아쳤다고 한다. 섀클턴은 웃음을 감춘 채 그에게 주방 보조를 맡겼다고.
표류 후…이어지는 기적
인듀어런스호 내부의 탐험대원들, 1915년경, 영국 그리니치 국립해양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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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8월 8일.
인듀어런스호는 영국 플리머스항에서 출항했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섀클턴은 여기서 합류)를 찍고, 11월 5일 남대서양 사우스조지아섬에 이르렀다. 이곳은 남극 대륙의 입구로 칭해지는 지역이었다. 섀클턴은 이대로 웨델해를 가로지를 생각이었다. 남극 루이트폴트 해안 서쪽의 바셀만에 내려 본격적으로 횡단에 나설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다음 해 1월 20일. 인듀어런스호는 끝내 웨델해를 넘지 못한 채 유빙에 포위되고 만 것이었다. 그렇게 배에서 9개월쯤을 갇혀 살고, 빠져나와선 또 6개월가량을 고립되고, 겨우 닿은 땅은 무인도와 다름없는 동토(凍土), 엘리펀트섬….
섀클턴과 스물일곱 대원은 지쳐있었다.
사실, 극한 추위 속 근 15개월의 표류에서 한 명도 죽지 않은 건 그 자체로 기적이었다. 과거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인듀어런스호가 출항하기 1년 전, 캐나다 탐험대가 탄 칼럭 호가 극지 탐사에 나섰다. 이들 또한 항해 중 빙벽에 가로막혔다. 결과는 고립. 승선 인원 스물다섯 중 상당수는 이성을 잃었다. ‘나부터’ 살기 위한 속임수가 이어졌다. 수개월 만에 열한 명이 죽었다. 섀클턴 탐험대의 인듀어런스호와는 분위기도, 결말도 아주 달랐다.
인듀어런스호의 마지막 순간, 1916, 미국 의회 도서관 [언더우드 앤 언더우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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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듀어런스호 안에서도 충돌(아마추어 복서 출신의 갑판장 존 빈센트가 몇몇 대원을 괴롭히다가 선원으로 강등)은 있었다.
다만, 이는 충분히 통제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섀클턴의 기묘한 면접법과 뜻밖의 융통성(밀항 소년 블랙보로는 낙천적 성격으로 대원에게 웃음을 줌)이 먹힌 것이다. 물론 섀클턴도 섀클턴이지만, 대원들의 정신력도 대단했다. 이들은 매일 저녁 빙 둘러앉았다. 항해사이자 사냥의 명수였던 휴버트 허드슨 등이 잡은 펭귄 고기를 먹고, 기상학자 레너드 허시의 밴조 음악을 들으며, 싱거운 노래와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았다. 상황이 아무리 절망적이어도.
말도 안 되는 도박판 위로
캠프 내 어니스트 섀클턴과 프랭크 헐리, 1914~1917년경, 작자 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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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언제까지고 그렇게 살 수는 없을 노릇이었다.
엘리펀트섬에 오고 닷새째. 보이는 건 약간의 펭귄과 바다표범, 발에 채는 건 악취를 풍기는 새똥뿐이었다. 이런 가운데, 남극의 겨울이 재차 무르익으려고 했다. 저번에는 그나마 배도 있고 연료도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날, 섀클턴은 또 한 번 결단해야 했다.
“갑시다.”
“예?”
정적을 깬 섀클턴의 말에 모두가 되물었다. “우리가 떠나온 곳, 사우스조지아섬으로 돌아갑시다.” 사우스조지아섬. 그곳은 유인 포경(捕鯨·고래잡이)기지가 있는 섬이었다. 하지만… 섀클턴의 말은 위험천만했다. ①이들이 타고 가야 할 건 갑판도, 동력원도 없는 길이 10m 미만 조각배였고 ②항해 거리는 1300~2000㎞까지도 생각해야 했으며 ③넘어야 할 곳은 이른바 ‘절규하는 바다’로 불릴 만큼 악명 높은 남극해 드레이크 해협이었다.
탐험대와 썰매견, 뒤에서 보이는 인듀어런스호, 1915, 영국 그리니치 국립해양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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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 섀클턴, ⓑ선장 프랭크 워슬리(육분의六分儀로 위도와 경도를 측정할 수 있었음), ⓒ이등 항해사 톰 크린(힘이 셌음), ⓓ전 갑판장이자 선원 존 빈센트(힘이 셌고, 섬에 남겨지면 사고를 칠 가능성이 있다고 봄)와 ⓔ티모시 매카시(순발력이 좋았음), ⓕ목수 해리 맥니쉬(배를 수리할 수 있었음).
4월 24일. 출항의 날. 배에 탈 수 있는 인원도 전체 중 고작 여섯뿐이었다. 새클턴은 남겨진 스물두 명에게 당부했다. 우리가 한 달 후에도 돌아오지 않으면, 어떻게든 다른 길을 찾으라고.
절규마저 집어삼키는 절규
1916년 4월 24일, 엘리펀트섬 해안에서 배를 진수하는 모습 [프랭크 헐리 촬영 추정본/일부 확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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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나 미친 항해였다.
섀클턴과 다섯 대원의 조각배가 가로질러야 할 드레이크 해협은 악명 그대로였다. 배가 마주한 건 밤낮 없이 몰아치는 시속 100㎞의 바람과 20m짜리 파도였다. 항해 중 마주한 맑은 날은 고작 3시간. 그러다 온 세상이 푸른 게, 하루 정도는 더 맑을 것으로 봐 기뻐했지만… 하늘을 뒤덮은 푸르름이 사실 엄청나게 큰 파도인 적도 있었다고 한다(이 경험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영화 《인터스텔라》를 촬영할 때 참고한 것으로 알려짐).
영화 인터스텔라 스틸컷. 섀클턴 탐험대의 경험을 참고한 것으로 알려진 장면이다. [크리스토퍼 놀란,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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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사이로 틈이 보이자 날이 맑아진 줄 알고 선원에게 소리쳤다.
하지만, 알고 보니 저건 (…)거대한 파도의 흰 물마루였다.
(…)26년간 이렇게 큰 파도는 본 적이 없었다.
(…)‘제길, 꽉 잡아! 여기로 온다!’고 외쳤다. 섀클턴은 당시를 이렇게 돌아봤다고 한다. 항해 막바지에 이르러선 말도 안 되는 큰 폭풍도 마주했다. 나중에야 알게 된 건이지만, 이는 사우스조지아섬 근처의 500t급 기선을 침몰시킬 만큼 잔혹한 재해였다. 그래도, 그럼에도… 조각배는 살아남았다. 열흘하고도 엿새를 더 이어간 죽음의 항해 속 사망자는 없었다. 기적의 연속이었다.
엘리펀트섬에서의 섀클턴 탐험대, 1916, 미국 의회 도서관 [언더우드 앤 언더우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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섀클턴 탐험대는 5월 10일, 드디어 사우스조지아섬을 볼 수 있었다.
섬의 북서쪽으로 상륙도 할 수 있었다. 이제는, 직선거리로 30~40㎞쯤에 있는 그곳, 포경기지로만 가면 될 상황이었다. 하지만… 가장 젊은 ⓓ존 빈센트와 ⓔ티모시 매카시는 탈진했다. 사실상 유일한 기술자인 목수 ⓕ해리 맥니쉬도 탈진 직전이었다. 셋은 이곳에 둬야 했다. 섀클턴을 포함, 나머지 셋 또한 만신창이인 건 마찬가지였다. 이 상태로 배를 또 한 번 끌고 가는 건, 이번에야말로 저승행이었다. 그래도 멈출 수는 없었다. 셋을 둔 채 셋이서라도 걸어가야 했다. 작게는 수백m, 크게는 수천m급의 얼음산이 우뚝 선 길 위를. 눈앞 설국은 누구도 두 발로는 가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였다.
모두의 생명줄을 쥔 ‘3인’
G. 마스턴, 밤, 보트를 끌어올리는 모습, 섀클턴의 마지막 탐험 이야기, 19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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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최후의 3인이 또다시 고개를 들었다. 이때가 5월 19일이었다.
먹을 건 사흘치 뿐. 등반 도구라곤 15m짜리 밧줄과 목수용 도끼, 나사못을 박은 신발 3켤레뿐이었다. 이들은 설산을 올랐다. 오르고, 내려가고, 또 오르고, 또 미끄러졌다. 당연히 잠은 자지 못했다. 어쩌다 넋을 놓으면 그 순간 저체온증이 찾아와 심장을 얼릴 터였다.
다 귀찮고, 그냥 드러누워 영원히 자고 싶었다.
(…) 얼음물을 마시고, 펭귄고기를 날로 억지로 씹어삼켰다.
비참함에 눈물이 나왔다. 최후의 3인 중 한 명, 선장 워슬리의 회고였다.
섀클턴은 종종 옆을 보고, 뒤를 봤다. 조는 이가 있으면 뺨을 때려 깨웠다. 우리 손에 나머지 스물다섯의 생명도 있다고 다그쳤다. 드디어 가장 높은 산마루에 올랐다.
(…)우리 셋이 마지막 단계인 (가장 높은)얼음산을 넘었을 때
(…)우린 분명 셋이었는데, 왠지 넷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상하게 생각돼 대원들에게 물어보니,
그들도 그렇게 느꼈다고 했다.
나는 믿었다.
신께서 여정 내내 동행했다는 걸. 이는 섀클턴의 회상이었다. 마지막 원정대 앞에 남은 건 낭떠러지와도 비슷한 내리막길이었다. 저 아래에는 사람이 있는 곳, 구조 요청을 할 수 있는 포경기지가 있을 터였다. 셋은 엮은 밧줄로 깔개를 만들었다. 나란히 올라탄 후, 세 사람 모두 한 덩어리가 되도록 묶었다.
거대한 격변, 섀클턴의 남극 탐험, 1916, 미국 의회 도서관 [언더우드 앤 언더우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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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음?
깔개에 기대 미끄럼틀 타듯 끝까지 내려갔다. 이 또한 대단히 위험한 짓이었다. 나무나 바위와 잘못 충돌하면 즉사였다. 하지만, 이들에겐 더 이상 서 있을 힘도 없었다. 그렇기에 운명을 또 한 번 하늘에 맡긴 셈이었다.
(…)마치 허공에 던져진 기분이었다.
처음에는 머리털이 모두 곤두서는 듯했다.
이내 몸이 달아오르고, 내가 웃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흥분해 고함을 질렀다. 워슬리는 당시를 이렇게 돌아봤다.
세 사람은 비틀거리며 섰다. 머리칼은 허옇게 셌다. 그리고 이들 앞에는, 포경기지 선원들이 기겁하며 서있었다. 설인 또는 귀신이라도 마주한 양. 5월 20일. 이때가 죽음의 행군에 나선 지 36시간 만이었다. 인듀어런스호가 사실상 항해 능력을 잃은 1915년 1월 20일부터 계산하면, 487일차 만이었다.
전설로 남은 실제 대화
어니스트 섀클턴, 노르웨이 국립 도서관, 1909년경 [조지 찰스 페리스퍼드 촬영, 아담 쿠어든 복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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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지 책임자 트랄프 쇠를레입니다.”
“섀클턴입니다.”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어서 오세요.”
“전쟁은 끝났습니까?(섀클턴이 탐험을 떠난 그해, 세계는 제1차 대전을 시작했다)”
“그럴 리가요. (…) 유럽은 광기에 휩싸였습니다.”
마지막 생존자를 향해서
인듀어런스호 탐험대 중 한 명과 썰매견들, 1915, 영국 그리니치 국립해양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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섀클턴은 기지 선원에게 인듀어런스호 탐험대가 지금껏 겪은 일을 알렸다.
배 한 척도 빌렸다. 이를 통해 낙오한 세 사람을 먼저 구출했다. 영국 국왕은 섀클턴에게 축하 전보를 쳤다. 죽은 줄 알았던 탐험대가 대서사시를 안고 살아온 데 대해 고마움을 전했다. 신문사도 이들의 이야기를 크게 실었다. 이제 남은 일은 하나뿐. 엘리펀트섬에 남은 스물두 명의 대원.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지만, 구조대와 함께 하루빨리 그곳으로 가야 했다. 첫 번째 구조선은 얼음에 가로막혀 돌아왔다. 두 번째 구조선은 조금 더 나아가려다 파손됐고, 세 번째 구조선은 사실상 침몰할 뻔도 했다. 남극 주변의 혹한 환경과 더불어 1차 대전 또한 발목을 잡았다.
섀클턴은 돌고돌아 칠레 정부로부터 배 엘코 호를 빌릴 수 있었다.
몇 번의 크고 작은 위기 끝에 드디어 엘리펀트섬에 닿을 수 있었다! 그해 8월 30일. 섀클턴 등 최후의 6인을 떠나보낸 후 129일, 통한의 첫 표류일로부터는 589일째가 되는 시점이었다. “모두 무사한가?” 섀클턴이 외쳤다. 엘리펀트섬의 생존자들이 한 말은….
아무도 죽지 않았다는 기적
1916년 4월 24일, 어니스트 섀클턴 등 여섯명이 엘리펀트섬을 떠나 사우스조지아섬으로 향하는 모습. [프랭크 헐리 촬영, 사진은 연출됐을 가능성이 있음] |
남은 대원들의 삶 또한 물론 쉽지만은 않았다.
사냥할 수 있는 펭귄과 바다표범의 수는 나날이 줄었다. 언젠가부터는 조개를 주워먹고, 해초를 뜯어 입에 넣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부상자도 있었다. 밀항 소년 블랙보로였다. 그는 발가락 동상이 심각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모두 잘 버텼다.
노련한 탐험가인 부대장 프랭크 와일드가 섀클턴 대신 통솔을 맡았다. 이들은 선박 조각을 붙여 캠프를 세운 채 있었다. 음식 또한 어떻게든 사흘치 이상의 양은 비축하고 있었다. 와일드는 섀클턴 일행이 늦어도 8월에는 돌아오리라고 믿었다. 혼자만 믿음을 품지 않았다. 그것을 모든 대원과 나눴다. “대장이 올 수 있으니 짐을 싸두거라.” 그는 날이 좋으면 이런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그게 모두에게 큰 힘이었다. 그렇게 절망에 젖지 않고, 계속해 희망의 끈을 쥘 수 있었다고 한다.
어니스트 섀클턴, 1914~1917, 빅토리아 주립 도서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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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죽지 않았다.
아무도 미치지 않고 아무도 무너지지 않았다. 이것은 모험사상 손꼽히는 위대한 실패이자, 위대한 성공이었다. 탐험대는 남극 횡단은 하지 못했지만, 그 대신 스물여덟 개의 우주를 지킬 수 있었다. 영국 정부도 이들의 무사 귀환을 기념했다. 섀클턴, 그리고 섀클턴의 추천서를 받은 대원 대부분에게 극지 메달(Polar Medal)을 안겼다.
극점 도달을 놓고 세기의 경쟁을 벌인 아문센과 로버트 스콧. 그리고, 이번에 살아 돌아온 섀클턴. 이들 셋과 일한 적 있는 지질학자 레이먼드 프리슬리가 한 말이었다. “(…)내가 그런 상황이었다면 탐험을 포기했거나, 살아서 돌아오지는 못했을 것이다. (섀클턴에게)조금만 더 경험이 있었다면 남극점 도달과 남극 대륙 횡단 모두 이루고도 남았을 것이다.” 이는 아문센이 직접 남긴 찬사라고 한다. 대서사시는 이렇게 끝났다.
에필로그
◎섀클턴은 이후 다시 남극 탐험대를 꾸려 원정을 떠났지만, 항해를 시작하고 얼마 안 돼 심장 발작을 겪고 쓰러져 사망했다. 1922년, 향년 48세였다.
◎부대장 프랭크 와일드의 재는 섀클턴 묘 오른쪽에 묻혔다.
◎밀항 소년이었던 퍼스 블랙보로도 극지 메달을 받았다.
◎전 갑판장이자 선원 존 빈센트와 목수 해리 맥니쉬 등 4명은 극지 메달을 받지 못했다. 빈센트와 맥니쉬는 ‘최후의 6인’이었는데도 그랬다. 섀클턴이 이들을 메달 추천 명단에 쓰지 않았기 때문. 이들이 생존 과정 중 치명적 사고 또는 실수를 저질렀을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섀클턴 탐험대의 최후 생존자는 당시 일등 항해사였던 라이오넬 그린스트리트였다. 그는 1979년, 90세 나이로 사망했다.
◎침몰한 인듀어런스호의 잔해는 2022년 남극해 3000m 깊이 아래에서 발견됐다.
참고 자료
섀클턴의 위대한 항해, 알프레드 랜싱, 뜨인돌출판사
Shackleton‘s Way, Morrell, Margot., Capparell, Stephanie, Penguin Books
Endurance, Lansing, Alfred, Basic 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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