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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9 (금)

    [문태준의 가슴이 따뜻해지는 詩] [100] 첫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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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일보

    일러스트=김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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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눈

    눈이 내린다.

    첫눈이 내린다.

    가을의 마지막 모습들을 지우며 내린다.

    떨어진 낙엽 위에

    시든 들꽃 위에

    흉물스런 빌딩 위에

    골목의 연탄재 위에

    흰 빨래 위에

    한강 위에, 저 혼자 흐르는

    고향의 시냇물 위에.

    하늘을 향해 누워 있는 모든 것 위에

    무슨 무슨 소문처럼 내린다.

    제멋대로 노는

    땅 위의 철없는 모든 것 위에 내린다.

    사정없이 내린다.

    첫눈은 그렇게

    우리들의 모든 모습을 지우며 내린다.

    -조태일(1941~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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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이 내린다. 초목의 시듦과 조락 위에, 고층의 건물 위에, 동네 좁은 길에 버려진 연탄의 타고 남은 재 위에. 눈이 내린다. 빨아 널은 깨끗한 옷 위에, 저 멀리 전남 곡성 동리산 태안사 아래 맑게 흐르고 있을 개울물 위에. 우리들의 이러하고 저러한 모습을 지우면서 눈은 내린다. 시인은 시 ‘사랑’에서 첫눈 내리는 것을 사랑의 모습이라고도 보았다. 움직이고, 숨을 쉬고, 꿈꾸는 것들 위에 첫눈은 내리고, “소리치지는 않고”, “오오, 오오, 그 입 모양만 보이며”, 뺨을 비비면서 우리 눈앞에 내린다고 썼다.

    조태일 시인과 인연이 깊었던 곡성 태안사 초입에는 조태일시문학관이 있다. 얼마 전에 들렀더니 한쪽 벽에 조병화 시인이 쓴 친필 글씨가 걸려 있었다. “조태일은 시인이다. 착하고 정직하고 곧고 의리의 시인이다. 어린이도 느끼는 시인이다”라고 적혀 있었다. 조병화 시인이 노환을 앓으면서도 생전에 마지막으로 쓴 육필이라고 했다. 시적 지향은 달랐지만, 조태일 시인은 조병화 시인을 평생 스승으로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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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태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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