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덕 도시문헌학자 |
오늘은 연말을 맞이해 올해 새로 개통한 철도 노선을 답사하면서 생각한 것을 말씀드리려 한다.
지난 9월 27일 전라남도 목포와 보성 사이에 목포보성선이라는 새로운 철도 노선이 개통됐다. 목포보성선은 경상도와 전라도를 동서로 잇는 경전선의 지선에 해당한다.
경전선은 20세기 긴 시간에 걸쳐 천천히 만들어지다 보니 철도 노선의 형태가 좋지 않다. 그래서 좀 더 운행하기 좋게 기존 노선을 개량하거나, 목포보성선처럼 완전히 새로운 지선을 만드는 사업이 이어지고 있다.
시민들이 광역적으로 이동하기 위한 수단으로는 철도·버스·자가용을 들 수 있을 텐데, 이 가운데 시간을 가장 정확하게 지켜주는 것이 철도다. 물론 버스와 자가용은 철도가 운행하지 않는 심야에도 운행하고, 이 시간대에는 길이 막히지 않기 때문에 철도보다 빠르게 목적지에 도착하기도 한다. 하지만 일상생활이 이루어지는 시간대에는 철도가 가장 정확하게 시민들의 이동을 보장해준다.
산업혁명이 시작된 근대 영국에서는 열차가 역에 도착하면 이에 맞춰 그 지역의 시민들이 시계를 맞추기도 했다. 이것이 철도의 정시성이다. 근대는 "시간은 돈이다"라는 철학으로 이루어진 시기다. 철도는 곧 근대 그 자체인 것이다.
철도의 정시성이 지니는 영향력이 크다 보니, 새로운 철도 노선이 개통되면 주변 지역들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예측하기 위해 현장을 답사한다. 이번에 개통한 목포보성선도 물론 전 구간을 답사하면서, 이미 변화하기 시작한 주변 지역의 교통지리학적 상황을 점검했다.
이렇게 목포보성선을 답사하던 중 전라남도 해남군에서 새로 영업을 시작한 해남역 주변에 갔을 때의 일이다. 답사 팀원들 가운데 철도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어 해남역 주변의 경치 좋은 곳에서 열차가 오는 것을 기다리게 되었다.
철도역에 가서 대합실이나 화장실에 들렀을 때, 그곳의 벽에 멋진 철도 사진이 걸려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런 사진들을 무심히 지나치겠지만, 실은 그런 사진을 한 장 찍기 위해서는 길게는 하루 종일 기다려야 하기도 한다.
그날은 해남역 주변에서 30분 정도를 기다려야 했는데, 철도 출사치고는 짧은 시간이었다. 그런데 나는 사실 철도 사진 찍는 데엔 큰 관심이 없기 때문에, 답사 팀원들이 열차를 기다리는 사이에 근처 마을을 살피기로 했다. 도시문헌학자라는 타이틀을 내걸고 있지만, 도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농산어촌 마을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평소의 생각이다.
철도 사진 찍는 포인트에서 5분 정도 걸어가니 버스 정류장이 나타났고, 그 옆에는 한때 구멍가게를 운영했을 것으로 보이는 건물이 있었다. 이곳에서 마을로 들어가기 위해 새마을교라는 다리를 건너니 농협창고가 나타났고, 좀 더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니 마을회관이 나타났다. 현재의 마을회관 옆에는 예전에 구판장을 운영했을 것으로 보이는 건물이 폐가로 남겨져 있었다.
마을 주변에는 20세기의 긴 시간을 들여 조성된 간척지가 펼쳐져 있었고, 마을 뒤편으로는 흑석산이라는 멋진 산이 자리하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그 땅에 자리 잡았고, 1970년대의 새마을운동 때 마을 구조가 한 차례 정비된 것으로 짐작되는, 고즈넉하고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철도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는 답사 팀원들이 그날 동행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평생 들를 일이 없었을 마을. 계획대로 답사하던 중, 계획을 벗어나 공간의 흐름에 올라탔을 때 우연히 발견한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글을 쓰는 사람마다 각자 나름의 방법이 있다. 내 경우는 글을 쓰기 전에 목표와 구성만 대략 설정하고, 구체적인 내용은 실제로 쓰다 보면 자연스럽게 흐름이 생기는 편이다. 목표와 구성이 지나치게 자세하면 글의 생동감이 사라진다. 답사 역시 50%의 계획과 50%의 우연한 흐름으로 이루어져야 현장에서 멋진 것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아마 인생도 그런 것 같다. 독자 여러분도 목표와 흐름이 조화를 이루는 멋진 새해를 맞이하기를 기원한다.
[김시덕 도시문헌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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