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4년 전 문재인 정부는 ‘K반도체 벨트’ 전략을 선포하며 충청권을 반도체 패키징(후공정) 산업의 핵심 거점으로 결정했다. 기업들도 이에 맞춰 중장기 투자 계획을 수립했다. 그런데 얼마 전 이재명 대통령이 주재한 반도체 전략 회의에선 “광주광역시에 반도체 첨단 패키징 클러스터를 구축하겠다”는 방침이 나왔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심지어 같은 정당 내에서조차 국가 핵심인 반도체 산업의 전략이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상황에서 어떤 기업이 투자할 수 있겠나.
광주·전남은 4년 전 문 정부의 지역 활성화 프로젝트 때 반도체 특화 단지에 응모했으나 탈락하고 대신 ‘미래차 소재·부품·장비 특화 단지’로 선정돼 해당 분야를 육성 중이다. 민주당이 호남에도 반도체 산업 일부를 넘기도록 정치적으로 압박한다면 이미 반도체 패키징 단지를 추진 중인 충청권과 지역 갈등이 불가피하다. 업계 관계자들은 “수도권과 충청권의 기존 클러스터를 활용해도 인재 확보가 버거운데 호남까지 확대하라는 것은 현실을 모르는 탁상공론”이라고 한다.
지금 반도체 업계의 현안은 ‘호남 경제’가 아니다. 글로벌 기술 전쟁에서 뒤처지지 않도록 연구·개발(R&D) 인력만이라도 주 52시간 근무제의 예외를 인정해 달라는 것이다. 공장 가동에 필수적인 안정적 전력망 확충도 절실하다. 이런 중대한 문제는 거들떠보지도 않으면서 지역 정치에만 신경을 쓰고 있다.
한국 반도체의 기적은 정치가 반도체를 몰라서 무관심했던 덕분이란 말이 있다. 기업이 치열한 생존 경쟁을 벌일 때 무지한 정치가 개입하지 않은 것이 도움이 됐다는 것이다. 뒤늦게라도 정치가 반도체를 돕겠다고 나선다면 환영할 일이다. 그렇다면 정치 논리는 철저히 배제하고, 연구·개발·전력·용수·각종 규제 해소 등 기업이 뛸 수 있는 운동장을 만드는 본연의 역할부터 해야 한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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