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욱 증권부장 |
서울의 한 경영대학에서 투자론을 지도하는 A교수. 학기 초 수강생의 투자 지역에 대해 물어본다. 국내 증시를 답하는 비율은 매년 낮아진다. 급기야 올 2학기엔 20명 중 단 한 명도 없었다.
서학개미 투자이민이 멈추지 않고 있다. 달러당 원화값이 급락했다지만 기세가 여전하다. 11월에만 55억달러 규모를 순매수했다. 전달(68억달러)에 비해선 줄었지만 9월(27억달러)에 비해선 배 가까운 수준이다. 당장이라도 1500선까지 밀릴 것 같은 달러당 원화값에 비상이 걸리면서 범인 찾기가 한창이다. 서학개미의 해외 주식투자가 원인인지를 놓고 갑론을박이 이어진다.
질문이 잘못됐다. 알토란 같은 자금을 굴릴 때 고민은 한 가지다. 어느 종목에서 가장 높은 확률로 고수익을 올릴 수 있는지다. 서학개미가 미국으로 향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미국에서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 때문이다. 한국 증시가 왜 투자자들에게 외면을 받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 먼저다.
최근 만난 금투업계 인사들에게 한국 증시에 대한 신뢰를 회복시킬 수 있는, 당장 시작할 수 있고 추가적인 부담과 저항이 작을 방안을 물어봤다.
의외였다. 상당수가 상폐 활성화를 꼽았다. 존속이 어려운 기업을 퇴출시키자는 것이다. 수십 년째 나오는 해묵은 답변을 꺼낸 이유를 다시 물었다.
한 증권사 대표는 "상품 가치가 없는 물건은 매장에서 치우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 가게에서 누가 쇼핑을 하겠느냐"고 반문했다. 또 다른 대표는 "수십 년째 나오는 기본적인 지적도 고쳐지지 않는 상황에서 선진 제도만 들여온다고 해서 시장이 업그레이드되겠는가"라고 물었다.
상폐 활성화는 매번 대책이 나올 때마다 빠지지 않는다. 19일 금융위원회의 업무보고에도 '다산다사(多産多死)'란 표현으로 포함돼 있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미국 증시 상장사는 30년 새 절반(1996년 8090개→ 2024년 4010개)으로 줄었다. 같은 시기 국내 증시 상장 종목은 3.5배(760개→2599개)가 됐다.
좀비기업이 늘수록 지수로 상장되는 증시의 활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특히나 해외 주요 지수들과 달리 코스피와 코스닥지수는 전 종목을 편입하고 있다. 장기 우상향이 뚜렷한 해외 증시 지수와 달리 코스피·코스닥지수가 장기 박스권에 갇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 자산운용사 임원은 "개인투자자들이 처음 투자할 때 보는 것이 장기 그래프"라며 "(그래프만 보자면) 해외 주식은 묻어놔도 된다고 생각하지만 국내 주식은 장투해도 손해란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고 꼬집었다.
현 정부 출범 후 국민성장펀드(5년 150조원), 5대 금융지주(500조원·포용금융 포함), 증권사 개인종합계좌(IMA)·발행어음 신규 인가(55조원 추가 공급) 등이 이뤄졌다. 모험자본 공급이다. 이 역시 상폐를 포함한 좀비기업 퇴출이 우선돼야 한다. 역대 정부에서 각종 펀드가 출범했지만 상폐를 포함한 퇴출의 배수구가 없다 보니 결국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란 비판을 받았다는 점도 참고할 만하다.
5천피를 내걸고 출범한 현 정부에선 증시 활성화 대책이 쏟아진다. 여당에선 '5천피 특위'까지 가동 중이다. 주주가치 제고를 포함해 주가 부양을 위해 가능한 대책은 모두 테이블 위로 올라온 듯 느껴질 정도다.
안타깝게도 더 많은 대책이 나올수록 시장에서 우려도 커지고 있다. 급진적인 변화가 오히려 기업을 움츠러들게 만들고 시장에 부담이 될 수 있어서다. 시장의 해묵은 기초 과제도 해결하지 못한 상태에선 아무리 좋은 해외의 우수 사례도 사상누각이 될 수 있다. 정치권, 정부, 금융당국이 서학개미와 금투업계를 탓하기 전에 더 고민할 부분이다.
[정욱 증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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