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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24 (수)

    이슈 애니메이션 월드

    소설만큼 깊고 영화처럼 압도적… 장르 허무는 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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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이프 오브 파이’·‘센과 치히로…'

    조선일보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 위 구명보트에 가까스로 올라탄 소년 ‘파이’(박정민)를 향해 호랑이 ‘리처드 파커’가 덤벼들 때, 관객도 파이의 공포를 함께 체험한다./에스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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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인도를 떠나 캐나다로 가던 화물선이 폭풍우에 침몰했다. 생존자는 227일간 태평양 바다를 표류한 소년 ‘파이’(박정민·박강현)뿐. 바다 위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티켓 대란을 일으키며 서울 역삼동 GS아트센터에서 순항 중인 ‘라이프 오브 파이’의 제작사 에스앤코는 이 공연의 장르를 ‘라이브 온 스테이지’라 부른다. 신동원 대표는 “연극처럼 배우와 퍼핏(puppet·인형)의 연기가 서사를 이끌지만, 음악과 움직임의 뮤지컬적 요소가 강하고, 첨단 무대 기술이 결합됐다. 연극, 뮤지컬 같은 기존 장르 구분으로는 규정할 수 없는 작품”이라고 했다. 무대 위에서 탈경계와 혼종성이라는 현대 예술의 특징을 ‘라이프 오브 파이’보다 더 강력하게 구현한 공연은 없었다.

    ◇소설 깊이와 영화 스펙터클 한꺼번에

    원작 소설(2001)은 파이의 고난과 사투, 심리 변화를 세밀하게 묘사하는 텍스트가, 영화(2012)는 CG로 구현한 화려한 비주얼이 강력했다. 공연은 영화의 시각적 충격을 첨단 무대 기술로 구현하면서, 소설의 깊이를 연극적 효과로 더 섬세하게 담아낸다. 원작 스토리텔링의 매력과 영화의 압도적 스펙터클을 한꺼번에 구현한 셈이다. 호랑이와 소년이 탄 구명보트를 이리저리 내던지는 가혹한 태평양의 폭풍우, 넓은 밤하늘에 가득한 별빛 등 경이로운 자연을 표현한 무대, 조명, 영상, 음악, 음향 기술은 토니상과 로런스 올리비에상을 휩쓸었다.

    파이는 “가장 위험한 동물은 인간”이며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오염시키는 두려움에 맞서기 위해 언어의 빛을 비춰야 한다”고 말한다. 인종과 문화의 경계, 인간과 동물의 구분을 묻는 원작의 철학적, 종교적 질문들은 무대 위에서 더욱 생생하다.

    ◇무대 스펙터클의 핵심, 퍼핏

    뮤지컬 ‘라이언킹’의 퍼핏이 신화적 이미지와 환상성이 강조된 형태라면, ‘라이프 오브 파이’의 퍼핏은 숨 쉬는 듯 정교하고 현실적이다. 사람이 아닌 호랑이 퍼핏(수상자는 퍼핏티어 7인)으로 영국 올리비에상 남우조연상을 받은 벵골 호랑이 ‘리처드 파커’의 위엄은 압도적. 1막 마지막, 구명보트 위 호랑이가 파이를 공격하려 펄쩍 뛰어오르는 순간, 관객도 파이처럼 ‘헉’ 하고 숨이 막히는 공포를 체험한다.

    하이에나는 얼룩말을 뜯어먹고 오랑우탄의 목을 부러뜨리며, 호랑이는 그 모두를 뜯어먹고, 채식만 하던 브라만 계급의 파이는 살기 위해 바닷거북을 죽여 고기를 먹고 피를 마신다. 인간 인지능력을 뛰어넘는 라이브 무대만의 아날로그 마법이 관객의 상상력과 결합해 만들어내는 환상적 순간들이 펼쳐진다.

    ◇‘센과 치히로…’ ‘토토로’도 무대로

    조선일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갖은 고생을 겪은 ‘치히로’(가운데)가 하얀 용으로 변한 강의 신 ‘하쿠’와 만나는 장면,/ CJ E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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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이프 오브 파이’뿐이 아니다. 지금 세계 공연계를 뒤흔드는 흥행작들은 장르 구분을 무력화하는 혼종성을 가장 날카로운 무기로 장착했다. 영국 로열셰익스피어컴퍼니(RSC)가 제작해 런던 웨스트엔드에 돌풍을 일으킨 ‘이웃집의 토토로’, 내년 1월 내한 공연을 앞둔 일본 도호 제작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하 ‘센과 치히로’)도 기존의 연극과 뮤지컬 장르 규정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센과 치히로’는 배우와 퍼핏이 서사를 이끌지만 인간의 손길이 느껴지는 아날로그 무대 기술로 미야자키 하야오와 스튜디오 지브리 애니메이션의 환상성을 그대로 무대 위에 구현하며 2022년 도쿄 초연과 일본 투어, 2024년 영국 런던 공연에서 30만 관객을 동원하는 등 흥행 기록을 써왔다. 뮤지컬이 아니지만 음악과 ‘움직임 언어’가 결정적이며 11인조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히사이시 조의 원작 음악 라이브 연주가 핵심적 역할을 하는 것도 공통점이다. 이렇게 장르 경계를 허문 공연에서 관객의 상상력은 인간 배우와 퍼핏에 이은 일종의 ‘제3의 배우’로 역할을 한다.

    내년 1월 7일 개막하는 ‘센과 치히로’의 1차 티켓 약 3만석은 오픈 당일 매진됐다.

    [이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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