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 통신사가 2024년 개발
O2가 개발한 데이지 할머니의 모습 /O2 유튜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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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 사기꾼들의 진을 쏙 빼놓는 ’78세 AI(인공지능) 할머니’가 등장해 국제적인 화제를 모으고 있다. 일본 아사히신문은 2일 영국 통신 대기업 ‘버진 미디어 O2(이하 O2)’가 개발한 AI 챗봇 ‘데이지(Daisy)’가 보이스피싱(전화금융사기) 범죄자들을 상대로 맹활약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인간의 목소리와 감정을 흉내 내는 AI 기술이 이제는 범죄를 예방하는 역할까지 맡게 된 것이다.
데이지는 산전수전 다 겪은 78세 할머니로 설정된 가상의 캐릭터다. O2가 2024년 11월 공개한 이 AI는 최신 대규모언어모델(LLM)에 음성 합성 기술을 입혀 탄생했는데, 상대방의 말을 실시간으로 듣고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대꾸하는 능력을 갖췄다. 개발 목적은 사기꾼과 최대한 길게 통화하며 시간을 낭비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기꾼이 AI와 씨름하는 동안, 실제 피해자가 될 수 있는 진짜 노인들에게 걸려갈 전화가 차단되는 효과를 노린 것이다.
사기꾼들이 이 함정에 걸려드는 방식은 꽤나 치밀하다. O2는 보이스피싱 조직이 인터넷 암시장이나 다크웹에서 불법으로 거래하는 사기 대상 전화번호 명부에 데이지의 가상 번호를 몰래 끼워 넣었다. 이를 모르는 범죄자들은 속이기 쉬운 독거 노인이라 착각하고 먹잇감을 낚아채듯 전화를 걸지만, 수화기 너머에서 기다리는 건 계좌번호가 아니라 끝나지 않는 수다 지옥’이다.
AI 데이지 할머니가 전화를 하는 가상의 모습. "이미 (전화를 한 지) 한 시간이 되간다"고 말하고 있다. /O2 유튜브 캡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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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히신문이 소개한 실제 통화 사례는 한편의 코미디를 방불케 한다. 금융 정보를 빼내려는 사기꾼이 가짜 앱을 설치하게 하려고 “구글 플레이(앱 장터)를 켜보라”고 유도하자, 데이지는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지금 페이스트리(빵)라고 했나? 화면에 삼각형 아이콘이 보이긴 하는데, 이건 파이 조각 같은데 말이야.” 당황한 사기꾼이 설명을 이어가려 해도 데이지는 “자네 동네에도 맛있는 페이스트리가 있나? 난 스콘을 정말 좋아해”라며 대화 주제를 빵 이야기로 돌려버렸다.
사기꾼이 다급하게 개인 정보를 요구할 때 데이지는 천연덕스럽게 딴소리를 시전한다. 사기꾼이 “컴퓨터 주소창에 ‘www’를 치세요”라고 지시하자 데이지는 “잠깐만, 안경 좀 찾고… ‘w’가 세 개라고? 우리 집 고양이가 자판을 밟고 지나가서 잘 안 눌려”라며 시간을 끈다. 금융 정보를 빼내려는 결정적인 순간에는 “그런데 자네, 뜨개질은 좀 할 줄 아나? 내가 요즘 손주 녀석 스웨터를 짜는 데 색깔이 고민이라서 말이야”라며 화제를 돌린다.
약이 바짝 오른 사기꾼이 결국 폭발하는 장면이 하이라이트다. 참다못한 범죄자가 “이 망할 할망구, 제발 시키는 대로 해!” “당신은 사람을 짜증나게 하는 천재군요”라며 비아냥대자, 데이지는 태연하게 “내가 원래 말이 좀 많은 편이라네. 늙으면 다 그래”라며 가볍게 받아넘긴다. O2에 따르면 지난 1년여 동안 무려 1000명 이상의 사기꾼이 데이지에게 속았고, 한 사기꾼은 장장 50분 동안이나 AI 할머니와 헛된 입씨름을 벌이기도 했다.
설 명절을 앞두고 보이스피싱 범죄에 대한 각별한 주의가 요구되고 있는 가운데 7일 서울 종로구 범정부 합동 전기통신금융사기 통합신고대응센터에서 직원들이 신고 상담을 하고 있다. /뉴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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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수다가 길어질수록 실제 피해자는 줄어든다. 이는 전문 용어로 ‘스캠베이팅(Scambaiting·사기꾼 미끼 물기)’이라 불리는 기법이다. 사기꾼이 데이지와 50분 통화하면, 그 시간 동안 진짜 피해를 볼 수 있었던 노인들에게 걸려갈 전화 수십 통이 차단되는 효과가 있다. O2는 이 같은 혁신적인 범죄 예방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해 10월 영국 마케팅 회사가 주관한 시상식에서 ‘최고의 AI 활용상’을 수상했다.
O2 관계자는 “데이지가 사기꾼의 시간을 뺏을 순 있지만, 결국 내 자산을 지키는 건 나 자신”이라며 “모르는 번호나 의심스러운 요구는 즉시 끊고 스팸 신고(영국 기준 7726)를 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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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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