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인 게이머 모임 ‘오토핀사운드’ 소속 게이머들이 지난 20일 서울 종로구 종로인명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역할수행게임(RPG) ‘디아블로Ⅳ’를 즐기고 있다. 강한들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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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일 서울 종로구 종로인명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 ‘불금’을 맞아 게이머 4명이 모였다. 함께 하기로 한 게임은 ‘디아블로Ⅳ’. 악마와 괴물을 처치하며 캐릭터를 성장시키는 역할수행게임(RPG)이다. 하지만 게임 화면을 보는 사람은 1명뿐이었다. 다른 3명은 게임 소리와 조이스틱 진동에만 집중했다. 헤드셋에서 “체력이 50% 이하입니다” “아직 스킬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라는 음성 안내가 괴물의 괴성과 함께 1초 만에 스쳐 지나갔다.
이날 모인 사람들은 시각장애인 게임 클랜 ‘오토핀사운드’ 소속 게이머들이다. 모임장인 김준형씨(33)를 중심으로 박동희씨(40), 서예림씨(31), 황인상씨(32) 등 10여명이 멤버다. 이들이 디아블로 게임을 할 수 있는 이유는 블리자드에서 ‘접근성’ 기능을 내장해뒀기 때문이다. 게임 내 접근성 기능을 켜면 화면이 없이도 소리만으로 게임을 할 수 있다고 한다. 게임 캐릭터 체력 상태부터, 기술 시전 시간, 괴물을 사냥했을 때 떨어지는 물품 등을 모두 ‘텍스트 음성변환(TTS)’으로 빠르게 읽어준다. ‘탐험’을 위한 목적지 안내는 주기적으로 나는 북소리로 알 수 있게 했다. 이들은 스스로를 “4명이 한 팀으로 괴물을 잡는 ‘어맹져스’”라고 부른다고 했다.
시각장애인 게임 모임 ‘오토핀사운드’ 소속 게이머들이 지난 20일 서울 종로구 종로인명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역할수행게임(RPG) 디아블로Ⅳ를 즐기고 있다. 강한들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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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시각이 아닌 청각만 사용해야 해 한계가 있기도 했다. 시각으로 정보를 받아들이면 여러 상황을 동시에 판단할 수 있지만, 소리는 반드시 순차적으로 전달될 수밖에 없어 누락하는 정보가 생기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괴물이 없는 허공에 마법을 쓰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시간제한이 있는 ‘던전 게임상황’에서는 다른 환경에서처럼 ‘길 안내’가 지원되지 않아 게임 캐릭터들이 벽으로 막힌 방향으로 가면서 시간이 지체됐다. 김씨는 “꼬불꼬불한 길을 잘 찾는 사람, 벽을 잘 우회하는 사람, 괴물 위치를 잘 찾는 사람 등 우리끼리도 역할이 나뉘어 있다”며 “던전 내 ‘길 안내’ 기능이 가장 먼저 추가돼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이들은 게임상에서는 언제든, 누구든 만나서 이야기할 수 있다는 점을 장점으로 꼽았다. 장애인들은 이동에 제약이 생기는 경우가 많아 자주 만나지 못한다. 황씨는 “늦을까 봐 5시간 전부터 와 있었다”며 “게임 내 음성대화 기능을 통해 편히 대화할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김씨가 진행하는 유튜브 생방송에는 ‘뉴비(초심자)’ 비장애인 게임 유저가 들어와 게임을 배우고 싶다고 하는 일도 있었다. 비장애인 눈에는 이들의 게임 실력이 ‘초능력’처럼 보였다고 한다. 비장애인 멤버 주모씨(44)는 “음성 안내음과 게임 효과음이 복잡하게 섞이는데, 필요한 정보를 골라서 듣는 게 초능력처럼 느껴졌다”며 “처음 게임을 시작할 때 클랜장님이 게임의 이모저모를 알려주고, 아이템도 습득할 수 있게 도와줬다”고 말했다.
시각장애인 게임 모임 ‘오토핀사운드’ 소속 황인상씨(32)가 지난 20일 서울 종로구 종로인명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역할수행게임(RPG) 디아블로Ⅳ를 즐기고 있다. 강한들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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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단순히 모여서 게임을 즐기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각자 게임을 하면서 불편했던 점들을 모아 다음달 게임 제작사인 블리자드엔터테인먼트에 ‘접근성 개선 제안서’를 보내기로 했다. 상황에 따라 어떤 소리가 나는지 알려주는 튜토리얼(지침)과, 던전 내 음성 길안내 작동, 음성 안내 속도·품질 개선 등 내용을 담았다.
서씨는 “게임 출시 초반에는 도저히 플레이를 할 수 없을 정도의 소리 안내만 돼서 ‘나중에 해야겠다’고 포기했었지만, 점차 개선되면서 즐길 수 있게 됐다”며 “제안서를 받은 블리자드가 하나씩 기능을 개선하고, 다른 게임에도 접근성 기능을 추가해나가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씨는 “장애인 게이머들의 참여로 게임 기능을 개선해서 누구나 불편함 없이 게임을 즐길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지난해 10월 낸 ‘장애인 게임 접근성 개선 가이드라인 개발 연구’를 보면 미국·유럽연합 등에서는 장애인의 게임 이용 개선 등을 위한 법제화까지 끝난 상태다. 연구진은 “게임 접근성 개선은 단순히 장애인의 이용권 보장 차원을 넘어 급증하는 시니어 게이머 등 보다 넓은 사용자층을 포용하는 전략이란 인식이 필요하다”며 “이용자 저변 확대와 글로벌 경쟁력 강화에도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돼, 정책적 기반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강한들 기자 handl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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