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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02 (월)

    [세계의 시, 시의 세계]비즈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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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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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에 빠진다는 건 오늘 날씨가 어떤가
    보려고 밖에 나가는 것과 비슷

    하지요. 오해는
    마세요. 당신이 그녀를

    사랑한다고 해서, 그녀도 당신을
    사랑한다는 걸 어찌 증명하겠어요, 그냥

    일어나는 일, 아주 희박한 가능성에
    당신 자신을 거는 수

    밖에요? 하지만 물물교환은 원래
    인디언에게는 생존 수단이었잖아요.

    기록에도 남아 있어요.

    - 로버트 크릴리(1926~2005)

    로버트 크릴리는 미국 블랙마운틴 유파에 속했던 시인으로, 간결하고 절제된 언어로 통렬한 성찰을 담은 시들을 썼다. 그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첫 번역 시선집 <나는 긴장을 기르는 것 같아>(정은귀 옮김)가 출간된 것은 불과 몇달 전이다. 로버트 크릴리의 시가 지닌 묘미는 단순한 일상어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시행을 어긋나게 배치하는 앙장브망(시행 엇붙임)을 통해 심리적 긴장을 조율하는 데 있다. 연과 연 사이에서도 하나의 문장을 종결하지 않고 분절함으로써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거나 균열을 일으킨다. 그로 인해 기대와 불안, 가능성과 불가능성, 믿음과 의심 등 사랑을 둘러싼 복잡한 심리가 불규칙한 호흡에 실려 전해진다. 우선 “사랑에 빠진다는 건 오늘 날씨가 어떤가/ 보려고 밖에 나가는 것과 비슷”하다는 첫 문장부터가 사랑의 사소하고 불확실한 시작을 말해준다. 사랑은 “그냥/ 일어나는 일”에 불과하며, “아주 희박한 가능성에/ 당신 자신을 거는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랑은 낭만적이고 숭고한 것이라는 우리의 환상을 여지없이 깨뜨리며 시인은 사랑을 인디언의 ‘물물교환’에 비유하기도 한다. 몸과 마음의 물물교환이 일종의 ‘생존 수단’이라는 점에서 사랑은 ‘비즈니스’라고 말할 수 있다. 현대인의 사랑에 대한 이러한 풍자가 비정하게 느껴지면서도 왠지 부정할 수 없다는 사실에 새삼 씁쓸해진다.

    나희덕 시인·서울과학기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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