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이두희 119종합상황실 소방위
119종합상황실에서 근무하며 가장 가슴 철렁한 순간은 화재나 사고 신고를 받았을 때가 아니다. 이미 사고가 발생한 지 한참이 지나서야, 혹은 타 기관을 거쳐 뒤늦게 접수된 '지연된 신고'를 마주할 때다. 특히 사업장 화학사고의 경우, 기업체들은 이미지 실추나 행정 처분을 우려해 자체적으로 수습을 시도하다 도저히 손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119의 문을 두드리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화학물질은 정직하다. 기다려주지 않는다.
△2025년 화학사고 데이터가 주는 경고
최근 국립소방연구원이 발표한 '2025년 화학사고 통계분석'결과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난 한 해 동안 전국에서 발생한 화학사고는 총 282건에 달한다. 지역별로 살펴보면 경기도가 53건으로 가장 많았으며, 필자가 근무하는 충북 지역 또한 20건으로 전국 시·도 중 6번째로 높은 발생 빈도를 기록했다.
충북은 대규모 산업단지와 화학 공장이 밀집해 있어 사고 발생 시 대형 재난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통계상 6위라는 수치는 결코 안전지대가 아님을 의미하며, 우리 지역 기업체들이 더욱 기민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강력한 경고등이다.
△왜 '119'여야만 하는가
많은 사업장에서 화학물질안전원이나 환경청 등 관계 기관에만 신고하면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하곤 한다. 물론 관련 법령에 따른 신고 의무도 중요하다. 하지만 인명 구조와 확산 방지를 위한 '실전 대응'의 주체는 소방이다.
119는 사고 접수 즉시 전문 대응팀을 투입하고, 인근 주민 대피와 오염 통제를 시작한다. 사고를 은폐하거나 수습 후 신고하려는 시도는 오히려 피해 범위를 키워 더 큰 법적, 경제적 책임을 불러올 뿐이다. '나중에'하는 신고는 수습이 아니라 '포기'에 가깝다.
△'신고가 우선'인 기업 문화가 정착돼야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 사고 발생 시 "우리가 해결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기보다 **"지금 즉시 119"**를 떠올리는 문화가 정착되어야 한다. 소방은 처벌하는 기관이 아니라, 사고로부터 기업의 자산과 근로자의 생명을 보호하는 '가장 든든한 파트너'다.
충북의 안전, 그리고 우리 일터의 안녕은 투명하고 신속한 신고에서 시작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상황실의 전화기는 깨어 있다. 사고는 숨길수록 커지지만, 신고는 빠를수록 작아진다는 사실을 모든 기업 관계자가 가슴 깊이 새기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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