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명욱의 酒키피디아] (7)
두 야심가의 술 대하는 태도 차이
세조실록에는 세조가 등장하는 다양한 술자리 얘기가 나온다. 애주가였던 세조는 술을 통치의 핵심 수단으로 활용했다. /국사편찬위원회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단종의 비극적인 생애를 다룬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흥행하면서, 세조와 한명회에 대한 관심이 다시 뜨거워지고 있다. 어린 단종의 왕좌를 빼앗고 끝내 죽음으로 몰아넣은 이들의 정치적 야욕 뒤에는 흥미로운 지점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술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다.
세조는 조선조 전체를 통틀어 가장 많은 술자리를 가진 애주가였고, 한명회는 철저한 절주가였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술자리’를 검색하면 973건이 등장하는데, 이 중 세조 시대 기록이 절반에 가까운 467건이나 된다. 세조는 술을 통치의 핵심 수단으로 활용했다. 술자리에서 신하의 충성심을 시험하고, 본심을 긁어냈다. 찬탈을 통해 왕위에 오른 그에게 술은 부족한 정통성을 메우고 신하들을 자신의 편으로 포섭하기 위한 심리전 도구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세조의 집요한 심리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조선 전기의 야사집 ‘소문쇄록(謏聞瑣錄)’에 전해지는 신숙주와의 ‘팔 꺾기’ 일화다. 세조는 평소 동갑내기였던 신숙주와 술자리에서 팔씨름을 즐기곤 했는데, 어느 날 취기가 오른 신숙주가 왕의 팔을 너무 강하게 비틀어버렸다. 그 순간 “아프다!”라는 세조의 비명이 들려왔다.
순간 연회장 분위기는 얼어붙었고, 황급히 마무리됐다. 세조는 신숙주가 괘씸했다. 아무리 친해도 아플 정도로 팔을 비튼다는 것은 왕의 권위를 떨어뜨리거나, 다른 신하들 앞에서 자신의 강함을 드러내고 싶어서가 아닌가 생각했다. 세조는 신숙주의 처소에 밤늦게 사람을 몰래 보냈다. 신숙주가 평소 습관처럼 새벽에 책을 읽고 있다면 이는 왕을 우롱한 뒤에도 태연한 것으로 간주하겠다는 의도였다. 상황에 따라서는 신숙주가 처형될 수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신숙주는 살 수 있었다. 싸해진 분위기를 감지한 한명회가 미리 신숙주의 집을 찾아가 등불을 끄고 책을 치우게 했다. 신숙주는 잠잘 수밖에 없었고,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세조의 술자리는 왕의 넓은 도량을 과시하는 장치가 되기도 했다. 이번에는 야사가 아닌 세조실록 4년(1458)의 기록이다. 집현전 학자이자 원로였던 정인지가 술기운에 세조를 향해 흔히 말하는 ‘야자타임’을 시연한 것. 즉 ‘너(汝)’라고 부르는 대역죄에 가까운 실수를 저질렀다. 신하들은 엄벌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지만, 세조는 의외로 너그럽게 넘겼다. 정인지를 아껴서라기보다는, 이미 권력의 정점에 선 자신에게 세력이 약해진 늙은 학자는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정인지는 세조의 관용을 보여주기 위한 ‘정치적 소품’으로 활용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술자리 실언이 모든 이에게 용납된 것은 아니었다. 계유정난의 공신이자 행동대장이었던 양정의 사례다. 세조는 평안도에서 고생하다 돌아온 양정을 위해 성대한 잔치를 베풀었다. 그런데 이날 양정은 다시 담을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바로 “왕을 그만 해라”, 직역하면 “세자에게 왕위를 양위하라”였다. 권력은 부모자식 간에도 나눌 수 없는 법. 양정은 이 발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처형당했다.
세조의 수족이었던 한명회는 세조와는 정반대였다. 그는 남들이 술에 취해 방심할 때 홀로 깨어 정국을 살폈다. 세조의 술자리 정치를 곁에서 지켜보면서도 결코 취기에 휘말리지 않는 철저한 자기 통제력을 보여주었다. 세조가 베푸는 광란의 술자리에서도 그는 정신 줄을 놓지 않았고, 남들이 숙취에 시달릴 때 인사권을 주무르며 권력 기반을 다졌다. 술자리를 이용한 세조의 정치 게임을 알고 있기에 더더욱 그랬는지 모른다.
그러나 술을 멀리했던 그조차도 ‘권력’이라는 이름의 독주(毒酒)에는 결국 취하고 말았다. 그의 오만이 극에 달한 사건은 세조가 죽고, 손자인 성종이 집권했을 때다. 그는 성종 7년 한강변에 정자를 하나 세웠다. 바로 압구정동의 유래가 된 압구정(狎鷗亭)이다.
그는 압구정에서 신하로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는 행동을 했다. 성종 12년 한명회는 자신의 정자에서 명나라 사신을 접대한다는 명목으로 성종에게 왕만 사용할 수 있는 ‘용차(龍遮·해 가리개)’를 빌려달라고 요구했다. 이 사건으로 한명회는 파직당하는 수모를 겪으며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술을 마시지 않아 실수는 피했을지언정, 권력에 취해 세상을 발아래 두려 했던 그 역시 오만의 취함에서는 벗어나지 못했다.
[명욱 세종사이버대 바리스타앤소믈리에학과 교수]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