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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20 (금)

    [윤명숙의 시니어하우스 일기] [10] 떠나는 이 붙잡지 말고, 오는 이 막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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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사 나가고 들어오는 사람들… 일상 흔들리며 금이 가는 것 같아

    나는 이곳의 느슨한 구닥다리 삶이 싫지 않다, 하루가 또 지나가네

    조선일보

    일러스트=이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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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자기 이사 나가는 사람이 많아졌다. 풍문으로 들으니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한 달 전 오픈한 아파트가 원인인 모양이다. 이곳으로 이사 온 지 2년여, 간신히 말 튼 이웃이 안 보인다고 하면 다 그리로 이사를 했단다. 말없이 떠났다고 불평할 처지는 아니지만 한솥밥을 먹어서 그런지 괜스레 마음이 술렁이고 서운하다.

    한동안은 떠나는 사람들 때문에 부산하더니 요즘은 새로 이사 오는 사람들의 이삿짐으로 승강기가 몸살을 앓고 있다. 이삿짐센터 직원들이 무거운 짐을 들고 씩씩대며 오르내리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여기가 실버하우스 맞나 싶다. 마치 고요한 연못에 난데없이 돌덩이가 떨어져 수면이 출렁이는 듯하다.

    건물도 사람처럼 나이를 먹는다고 생각하면 지은 지 18년이 된 이 시니어하우스는 머리 희끗한 중년쯤 되려나? 늙음이 한순간에 찾아오듯 건물도 갑자기 노후돼 여기저기 보수할 곳이 생기고 있다.

    보수 공사를 하자면 어쩔 수 없이 불편을 겪어야 한다. 복도 한 층을 도배하는 것만 해도 보통 일이 아니다. 임시로 쳐놓은 비닐 가림막이 펄럭여 먼지가 풀풀 날리는 중에 사다리 위에 올라가 벽지를 붙이는 인부들을 피해 다니는 것만도 고역이다. 어디를 뚫는지 드릴 소리도 만만치 않다. 예민한 성격이 아니어도 여차하면 새 아파트로 이사할 마음이 들 만도 하다. 대로변 번듯한 상가들도 온통 공실로 몸살을 앓고 있던데, 이 중년의 시니어하우스가 신흥 거점이 된 옆 동네의 막강한 경쟁자와 상대해서 승산이 있을지 미지수다.

    신흥 강자의 영향력은 여기 식당까지 밀려들었다. 바로 내 뒷자리, 견고한 4인방의 식탁을 흔들어 놓은 것이다. 그중 한 명이 새 아파트로 이사를 가자 그 빈자리를 신출내기가 냉큼 메웠다. 그 신입은 한 달 살이를 해본 뒤 살던 집을 팔고 곧장 이리로 들어온 칠십 초반의 젊은 여자다. 성격이 활달해서 처음 보는 사람한테도 언니라는 호칭을 거침없이 쓰는데, 낯선 곳에 쉽게 적응하려면 이런 넉살 좋은 성격은 큰 무기가 된다. 게다가 입담도 좋다. 덕분에 식탁 분위기가 밝아지고 화기애애하니 괜히 옆 식탁까지 덩달아 즐거워진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남은 세 명 중에서 마곡으로 떠난 사람과 특히 친했던 이가 이렇다저렇다 말 한마디 없이 지척의 다른 식탁으로 옮겨 앉은 것이다. 2년이나 한 밥상에서 밥을 먹었어도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 법. 그래도 절차라는 게 있지 않나. 굳이 옮겨 앉고 싶으면 그럴듯한 구실을 만들어 이해를 구하거나 숫제 멀찌감치 떨어져 앉으면 될 것을 왜 하필 코앞에 앉아 신경을 긁어댈까. 남은 세 사람은 서로 눈치만 보더니, 어느 날 말을 아껴가며 넌지시 운을 떼길, 나더러 그 자리로 오란다. 아무것도 모를 때 같으면 별생각 없이 가 앉았겠지만 나도 산전수전 겪은 2년 차가 아닌가. 입장 애매해질 그 자리에 좋다꾸나 하고 덥석 앉을 정도로 사리 분별을 못 하지는 않는다. 짝을 핑계 삼아 몸을 사리니 그들도 수긍하며 웃고 말았다. 별별 사람과 부대끼며 사는 방법을 여기서 빡세게 터득하고 있는 내가 기특하다.

    요즘은 나와 친분을 맺으려는 이도 제법 생겼다. 내가 글을 쓴다는 소문이 났는지 원고지에 습작한 글을 건네주며 읽어보라는 분도 있고 출간한 책을 부끄럽게 건네고 가는 분도 있다. 어느 날 식당에서 유난히 머리가 희고 차분한 인상을 지닌 남자분이 내 식탁으로 왔다. 대뜸 내가 쓰는 신문 칼럼을 재미있게 읽고 있다면서 자기도 출판한 책이 있는데 우편함에 넣어 놓겠다고 했다. 좀 뜬금없었지만 싫지는 않았다. 서둘러 주변 사람들에게 저분이 어떤 분인지 물어보니 은퇴한 부부 교수인데 부인 건강이 안 좋다더라는 말이 들렸다. 단박에 내 궁금증이 도졌다. 궁색한 소문을 주워듣기보다 우편함에서 가져온 책을 읽는 편이 빨랐다.

    그의 책은 말하자면 자서전이었다. 보통은 저자의 무용담으로 지루하기 일쑤인데 이분의 글에서는 자랑이나 공치사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너무나 훌륭했다. 이곳에서 그를 만날 수 있었던 것에 감사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그분에 대한 안 좋은 소리를 들었다. 내용인즉, 그분이 늘 앉는 식탁에 이곳 사정에 어두운 새내기가 눈치 없이 앉아서 밥을 먹었는데 뒤늦게 나타난 그분이 버릇없이 남의 자리에 앉았다고 소리소리 지르며 싸우더란다. 어찌 이럴 수가! 하도 황당한 말이라 제대로 상황 파악을 하고 전하는 말인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그 고약한 교수’라고 단정까지 짓는데, 그 사람이 잘못 봤다는 증거도 없으니 내 머릿속이 혼란에 빠질 수밖에.

    그러던 중 마침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의 부인과 마주쳤다. 평소보다 더 환한 표정으로 내게 바짝 다가와 “우리 마곡으로 이사를 가요”라고 속삭였다. 내가 “네?” 하고 되물었더니 밝게 웃으며 “여긴 계약 기간이 다 됐다고 연장하라네요” 했다. 식당으로 걸어가면서 우리는 대화를 이어갔다. “그럴 바에야 새집에서 살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이사 간다고 아무한테도 말 안 했는데, 가기 전에 작가님한테는 꼭 말하고 싶었어요.”

    나는 그들이 떠난다는 말에 진심으로 섭섭했다. 고약한 교수라는 의심은 자리도 잡기 전에 꼬리를 감췄다. 그저 소중한 이웃을 놓쳤다는 아쉬움만 컸다. 겨우 2년 살고 내가 너무 안일해졌나? 내 이웃도 사정에 따라 선택을 바꿀 수 있다는 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갑자기 일상이 흔들리며 금이 가는 것 같다. 문득 맹자의 말 ‘왕자불추 래자불거(往者不追 來者不拒)’가 생각났다. ‘떠나는 이 붙잡지 말고 오는 이 막지 말라’는 이 말을 전에는 건성으로 듣고 우스갯말로 써먹기까지 했는데, 이제 알겠다. 상한 마음을 추스르는 데는 이만한 명언이 없구나.

    아침에 먹은 밥이 한나절이 지나도록 명치 끝에 걸린 듯 내려가지 않는다. 나는 1층 ‘행복한 병원’으로 쪼르르 내려간다. 대기실에는 아무도 없다. 무료하게 앉아 있던 간호사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켜 생년월일을 묻는다. 진료실에 들어서니 의사 선생님이 환하게 웃으며 안부를 건넨다. 노인들의 크고 작은 호소를 싱글벙글 받아주는 사람이 바로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곳에 머무를 이유는 충분하다.

    아무리 옆 동네의 새 아파트가 반짝이며 손짓해도, 나는 이곳의 느슨한 구닥다리 삶이 싫지 않다. 떠나는 사람 붙잡지 않고, 오는 사람 경계하지 않는 곳. 오늘도 얹힌 밥은 결국 내려가고, 하루는 또 이렇게 지나간다.

    ※‘윤명숙의 시니어하우스 일기’ 연재를 마칩니다. 독자 여러분과 필자에게 감사드립니다.

    [윤명숙 작가·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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