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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21 (토)

    [태평로] 노란봉투법보다 더 중요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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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 정책 새로 나올 때마다 혼란

    노란봉투법도 시행 후 현장 혼선

    제도보다 노사 신뢰 구축이 중요

    신뢰 기반 없이 제도 만들면 실패

    “기업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준조세”(고용보험), “제2의 IMF를 부를 수 있다”(주 5일제), “자영업이 무너지고 일자리가 사라진다”(최저임금 인상). 새로운 노동 제도가 나오면 불안(또는 불만)이 폭주한다. 사회는 들썩이고 반목이 넘친다. 그런데 지나고 보면 시장은 적응하고 기업은 버틴다. 다만 그 갈등이 남긴 ‘불신’이 쌓인다.

    이번엔 ‘노란봉투법’이다. 하청 노동자의 실질 사용자로 원청을 인정해 교섭 책임을 넓히고, 파업 등 쟁의 행위에 대한 과도한 손해배상 청구를 제한하겠다는 취지. 산업계가 대혼란에 빠질 것이란 우려가 또 쏟아졌다.

    지난 10일 시행 후 9일 만에 683개 하청 노조가 287개 원청 기업에 교섭을 요구했다. 대상 인원만 12만7000명. 하지만 실제 협상에 들어간 건 13곳. 나머지는 적합성을 따지겠다며 멈춰 섰다. 법은 세웠지만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모양새다.

    노동 전문가들은 정책 성패를 가르는 건 제도의 설계가 아니라 노사 간 신뢰의 밀도라고 지적한다. “문제는 제도가 아니라 신뢰의 결핍”이란 얘기다. 믿음이 빠진 합의는 종착점이 아니라 경유지에 불과하다. 억지로 봉합한 갈등은 시간을 두고 더 크게 벌어지기 마련이다.

    아사히글라스 사태가 그랬다. 같은 공장에서 같은 일을 하면서도 다른 대우를 받던 하청 노동자들이 노조를 결성했다. 돌아온 건 문자 해고였다. 176명이 하루아침에 일터를 잃었다. 10년 전 일이다. 긴 법정 싸움 끝에 노동자들이 승소했지만 85~90%는 복직하지 못하고 있다. 법적 판단은 내려졌지만 관계는 파탄난 뒤. 노란봉투법이 있었다면 달라졌을까. 협상 테이블을 더 빨리 마련했을지 모르나 신뢰가 깨진 상태에서 타협은 더 큰 파국을 잠시 미뤄두는 위태로운 균형일 뿐이다.

    노동 지형은 달라지고 있다. 하청은 더 넓고, 더 깊게 퍼진다. 자동차·조선업에선 생산 상당 부분이 이미 공장 밖으로 이동했다. 플랫폼 노동에선 사용자와 노동자 경계가 흐릿해진다. ‘공장 내부 하청’이 ‘사회 전반 하청’으로 확장되는 중. 이런 변화 앞에서 단순한 규제 강화는 반쪽짜리 처방에 머문다. 손해배상 부담을 키우면 파업이 줄긴 한다. 비용이 커지면 행동은 위축되는 법. 그러나 파업 감소와 갈등 해소는 다른 차원이다.

    노사 분규는 2015년 105건에서 2023년 223건(2024년 131건)으로 두 배 늘었다. 노동 손실 일수는 지난 10년간 연 40만 일 수준에서 답보 상태다. 파업→협상→타결→재발. 이 익숙한 악순환은 제도가 미흡해서가 아니다. 신뢰가 깔리지 않은 탓이다.

    영국은 손해배상 책임을 강화해 노조를 약화시켰지만 협력 관계로 이어지지 못했다. 갈등은 사라지지 않고 형태만 달라졌다. 독일·스웨덴은 충돌을 억누르지 않았다. 제도 안으로 끌어들였다. 의사 결정에 참여시키고 협상 구조를 안정시켜 갈등을 ‘관리 가능한 상태’로 바꿨다.

    이제 더 큰 충격이 다가온다. AI는 노동 구조를 재구성한다. 알고리즘이 일을 배분하고 평가하는 시대 ‘누가 사용자냐’는 모호해진다. 노동 문제 중심축은 고용에서 이동, 관계에서 전환으로 움직이고 있다. 기업은 전환을 설계해야 하고, 노동은 변화에 적응해야 한다. 국가는 그 과정을 떠받쳐야 한다. 이 과정에서 신뢰가 없으면 아무리 좋은 제도라도 사상누각(沙上樓閣)일 뿐이다.

    질문이 달라져야 한다. “노란봉투법이 옳으냐, 그르냐”가 아니다. “이 법이 노사 간 신뢰를 만들어낼 수 있느냐”다. 그 물음에 답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혼란은 계속되고 갈등은 고장 난 축음기처럼 끝없이 재생될 것이다.

    [이위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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