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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26 (목)

    [김홍표의 과학 한 귀퉁이]적혈구 산에 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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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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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실 물 구하기로 따지면 사막이나 바다나 어렵기는 매한가지다. 수상가옥이나 뗏목 위에 사는 까닭에 ‘바다 유목민’으로 불리는 인도네시아 바자우(Bajau)족은 육지나 섬으로 가서 물통에 물을 길어온다. 아버지가 지게 양쪽, 2개의 물통에 길어온 물로 밥하고 씻고 마셨던 내 어린 시절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생활이다. 그러나 바자우족은 바다에서 작살로 물고기를 잡고, 해삼을 채집하고, 산호를 모아 장신구를 만들어 파는 것을 생업으로 삼았다.

    333 생존 법칙이라는 용어가 있다. 공기 없이 3분, 물 없이 3일, 그리고 음식 없이 3주를 버티기 힘들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바자우족 잠수부들은 물과 공기를 얻느라 이중고를 겪는 셈이다. 이런 방식으로 바자우족은 천년 넘게 인도네시아 주변 바다에서 해상생활을 해왔다. 그동안 바자우족은 육지 사람과 사뭇 다른 어떤 종류의 생물학적 참신성을 획득하지 않았을까?

    한곳에 정착하는 삶을 살며 인류가 농사를 짓거나 가축을 사육한 지는 얼추 1만년이 넘었다. 유럽의 스웨덴이나 아프리카 수단, 중동의 요르단 사람들은 자신들이 기르던 소나 낙타의 우유를 물처럼 마셔도 속이 부대끼지 않는다. 어릴 적 유용하게 써먹었던 젖당 분해효소가 나이를 먹어서도 온전히 기능을 유지했기에 가능한 역사적 사건이다. 말라리아가 기승을 부리는 곳에 사는 사람들은 적혈구 모양을 바꿔가며 병원균에 맞섰다. 이런 유전적 가소성 덕분에 인류는 살기 팍팍한 곳에서도 거뜬히 살아남았다.

    안데스산맥의 도시인 라 린코나다는 해발 약 5100m에 자리한다. 조성은 같지만 공기 농도가 한참 부족한 탓에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들숨에는 산소가 모자란다. 생리학적으로 저산소 상태를 마주하는 것이다. 안데스인은 적혈구 또는 산소 운반 단백질인 헤모글로빈의 수를 늘려 이 상황에 대처했다. 그러나 늘어난 적혈구는 혈액의 점성을 높여 얼마간 심장에 부담을 줄 수 있다. 이와 달리 티베트인은 헤모글로빈의 산소 친화도를 높여 적혈구의 산소 운반 능력을 높였다. 이는 엄마 배 속에서 태아들이 흔히 취하는 생존 전략이다. 유전자를 손보든 세포나 폐의 해부학적 장치를 개선하든, 고산지대에 사는 사람들은 각기 다른 방편을 취해 행복한 숨쉬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렇다면 매일 다섯 시간을 잠수하는 바자우인은 어떤 기예를 터득했을까? 뜻밖에도 이들은 비장(spleen)의 크기를 늘렸다. 본디 비장은 오래된 적혈구를 처리하는 기관이다. 바다표범이나 돌고래처럼 바다로 돌아간 포유류는 얼굴에 찬물이 닿으면 잠수 반사 반응을 시작한다. 심박수가 떨어지고 혈액이 신체 중심부로 몰리며 비장이 수축해 산소가 풍부한 적혈구를 방출하는 것이다. 필요할 때마다 적혈구를 내놓았다가 나중에 다시 거둬들이는 전략은 썩 그럴싸해 보인다. 육지 사람보다 바자우족의 비장이 50% 정도 더 크고 물속에서 오래 버틴다는 사실이 국제 공동연구진의 시야에 포착됐다. 갑상선 활동을 늘리는 유전자가 돌연변이를 겪은 결과였다.

    여러 연구 결과를 살펴보면 인간 유전자는 생각보다 빠르게 진화하는 듯 보인다. 특히 3분이 강제하는 삶의 절박함은 산소를 운반하는 적혈구를 두고 몇가지 혁신을 끌어냈다. 숨 쉬고 살려면 얼른 태세를 바꿔야 한다고 닦달하는 듯싶다.

    이런 점은 숫자로도 느낄 수 있다. 올해 3월 ‘세포대사’에 실린 논문을 보면 적혈구는 우리 전체 세포의 85%를 차지한다. 뇌가 체중의 2%에 불과함을 떠올리면 적혈구 무게가 몸무게의 4%를 차지한다는 사실은 더욱 놀랍기만 하다.

    과학자들은 비장의 성능을 조절해 산소 부족을 겪는 사람을 도울 수 있지 않을까 궁리한다. 이를테면 코를 심하게 고느라 수면무호흡증에 자주 빠지는 증상을 고칠 수도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최근에는 적혈구가 포도당의 1차 저장소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도 나왔다. 필요한 기관에 산소를 떨굴 때 포도당 대사체가 쓰이기 때문이다. 이는 높은 데 사는 사람의 혈액에 포도당의 양이 훨씬 적은 까닭이기도 하다. 적혈구가 혈액을 떠도는 포도당을 끌어다 산소 운반에 오롯이 투자하는 덕분에 벌어진 현상이다. 그렇다면 당뇨병을 치료할 방편으로 환자를 저산소 상태에 노출하는 일이 가능하지 않을까?

    높은 주파수로 직박구리가 울고 햇살 좋은 봄날, 진달래 따라 동네 뒷산이라도 올라보자. 숨이 턱밑까지 차오를 때 적혈구가 장딴지에 산소를 공급하고자 핏속 포도당을 얼마나 갹출하는지 살펴도 볼 겸.

    경향신문

    김홍표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김홍표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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