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살 소년은 유난히 눈을 자주 깜빡였다. TV를 보면서도 눈을 찡그렸다. 걱정이 된 부모가 소년의 손을 끌고 안과를 찾았다. 검진 결과 약시. 야외 활동을 하며 녹색을 많이 보는 것이 좋다는 의사의 권유에 부모는 소년에게 테니스 라켓을 쥐여줬다. ‘안경잡이’ 테니스 선수 정현(22·한국체대)이 운동을 시작한 계기다. 테니스 지도자 아버지의 핏줄까지 물려받은 정현은 하루가 다르게 실력이 늘었다.
▷정현의 장점은 빠른 공을 눈으로 좇아 반응하는 동체시력(動體視力)이다. 역설적이지만 정현의 동체시력을 키운 것은 약시다. “시력이 좋지 않아 사물을 볼 때 보통 사람보다 더 집중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동체시력이 발달했다”는 것이 정현의 어머니 김영미 씨의 설명이다.
▷정현이 만 11세 되던 2007년 이형택(42·이형택 테니스아카데미재단 이사장)이 2000년 이후 7년 만에 US오픈 테니스 16강에 진출했다. 이런 그의 활약을 보고 자란 ‘이형택 키즈’ 정현이 기어이 일을 냈다. 정현은 22일 호주오픈 16강전에서 노바크 조코비치(세르비아·세계랭킹 14위)를 꺾고 한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메이저대회 8강에 진출했다. 조코비치는 정현 스스로 ‘우상’이라고 부른 선수. 무려 223주간 세계랭킹 1위 자리에 오른 스타다. 이날 정현은 자신의 두 우상을 한꺼번에 넘어섰다.
▷어린 선수들은 영웅을 바라보며 동기를 얻는다. 박세리의 영향을 받은 박인비, 신지애, 최나연은 이제 다음 세대 골퍼들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세리 키즈’를 넘어 ‘인비 키즈’라는 말도 나왔다. 과거 투수들이 선호하는 등번호는 에이스를 상징하는 1번이었다가 박찬호 이후 61번으로 바뀌었다. 비록 나이 제한에 걸려 평창 올림픽에서 볼 수는 없어도 한국 여자 피겨스케이트 1인자 유영(14)은 당당한 ‘연아 키즈’다. 조코비치와의 경기에서 승리한 뒤 관중석을 향해 큰절을 한 정현은 월드스타로 손색없는 여유를 보였다. 정현이 ‘테니스 불모지’ 한국에서 새 역사를 계속 써 나가는 동안 수많은 ‘정현 키즈’도 탄생했으면 한다.
주성원 논설위원 s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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