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지 않은 일이지만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가 의회 반대파들을 설득해 브렉시트안을 통과시키거나 △EU(유럽연합)와의 재협상 이끌어낼 수도 있다. 메이 총리가 영국 의회나 EU 중 어느쪽도 설득하지 못 할 경우 △브렉시트를 철회하기 위한 제2의 국민투표를 진행하거나 △이도저도 안되면 어떤 합의안도 없이 EU를 탈퇴하는 노딜 브렉시트의 혼란 국면으로 치닫을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 /가디언 |
브렉시트 합의안 비준을 둘러싼 쟁점은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 간 국경문제다. 브렉시트 이후 북아일랜드는 영국에 남고 아일랜드는 EU에 잔류할 예정이다. 이에 따라 영국 강경파는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 간 ‘하드 보더’(Hard Border·국경 통과 시 통행과 통관 절차를 엄격히 적용하는 것)가 적용해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EU는 북아일랜드도 EU 관세동맹 안으로 포함시켜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평행선을 달리던 양측은 브렉시트 최종 합의안에 하드 보더를 피하기 위한 합의에 이르지 못할 경우 영국 전체를 당분간 EU 관세동맹에 잔류하도록 하는 ‘안전장치(backstop)’를 포함시켰다. 문제는 안전장치가 가동되면 영국이 일방적으로 협정을 종료할 수 없어 합의안을 찾을 때까지 EU에 계속 잔류해야 하는 상황에 처할 수 있다는 점이다.
메이 총리는 안전장치를 포함시키자는 EU측에 동의했지만 영국 내 하드 브렉시트파는 안전장치를 없애야 한다고 고집하고 있어 합의점을 찾기가 쉽지 않다. 이 때문에 메이 총리는 10일 회의를 열고 11일 예정됐던 하원 브렉시트 합의안 승인 투표를 연기했다.
① 의회를 설득하는 방안
영국 하원의 브렉시트(BREXIT·영국의 유럽연합 탈퇴)안 투표를 연기한 메이 총리에게 남은 가장 현실적인 대안은 ‘설득’의 작업이다. 메이 총리는 브렉시트 합의안에 반대하는 영국 의원들을 빠른 시간 내에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합의안에 대한 비준 동의를 이끌어내야 한다.
메이 총리는 영국 의회의 비준 기한인 내년 1월 전까지 투표일을 재지정한 뒤 의회의 비준을 받아내야 한다. 이론상으로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약 한 달 넘게 남은 기간 동안 집권당인 보수당 일부까지 가세한 반대 여론을 설득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영국 스카이 뉴스에 따르면, 이번 표결이 예정대로 진행됐을 경우, 찬성표는 200표를 넘지 못하는 반면, 반대표는 400표가 넘었을 것이라는 예상이 나왔다. 또한 약 100명의 영국 보수당 의원들이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있으며, 이미 메이 총리 내각에서 20명의 장·차관이 브렉시트 합의안에 반대해 사임했다.
영국 가디언은 투표 연기로 정치적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보수당과 하원 내에서 메이 총리에 대한 정치적 압박이 커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가디언은 "당 내부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면 메이 총리의 당 지도력에 대한 도전을 불러일으키는 상황이 초래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도날트 투스크 EU 정상회의 상임의장. /투스크 트위터 |
② EU와 재협상 방안
EU와의 재협상을 통해 브렉시트 합의안을 수정한 뒤 의회의 비준을 받아내는 방안도 있다. 메이 총리가 하원 승인 투표를 연기한 이유 중 하나는 EU를 설득해 재협상을 이끌어내기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해서라는 분석이 제기됐다. 이날 메이 총리는 "유럽연합 회원국들의 협상 파트너들을 만나러 가겠다. 하원이 표명해온 명백한 우려들에 대해 논의할 것"이라고 재협상 가능성을 시사했다.
메이 총리는 오는 13~14일 예정된 EU 정상회의를 앞두고 회원국 정상들을 만나 브렉시트 합의안과 관련해 논의할 예정이다. 메이 총리는 당장 마르크 뤼터 네덜란드 총리,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면담 일정을 잡았다.
그러나 EU는 재협상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 메이 총리가 투표를 연기한 직후 도날트 투스크 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은 트위터를 통해 "EU 27개국 회원국들은 브렉시트 합의안에 대한 재협상을 하지 않을 것"이라며 "영국의 의회 비준의 원활한 진행을 돕기 위한 방안을 논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③ 브렉시트 제2 국민투표 개최
브렉시트 합의안 비준을 앞두고 메이 총리가 투표를 연기하는 등 국정 혼란이 빚어지자 브렉시트 결정을 번복하자는 여론도 제기되고 있다. 국민투표를 다시 실시해 브렉시트 여부를 신중하게 결정하자는 것이다.
특히 9일 유럽사법재판소(ECJ)가 "영국은 EU의 동의를 얻지 않고도 브렉시트 결정을 번복할 수 있다"는 판결을 내리면서 브렉시트 재투표설에 힘이 실리고 있다. ECJ는 "EU 회원국의 동의를 얻어야 브렉시트를 철회할 수 있는 건 국제법에 맞지 않고, 영국은 일방적으로 브렉시트를 중단할 자유가 있다"며 "이 철회는 (영국) 자체 헌법 요건에 따라 결정돼야 하며, 영국은 어떤 조건의 변화도 없이 EU에 남아있을 수 있다"고 했다.
다만 영국 의회가 브렉시트를 지지한 경우엔 브렉시트 재투표에 대한 의원들의 지지가 있어야 한다.
최근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를 비롯해 대부분의 정당에서 조금씩 제2 국민투표를 지지하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일각에서는 11일 예정됐던 하원 승인안 투표가 부결되면 메이 총리가 직접 나서서 국민투표를 제안할 수도 있다는 전망도 나왔다.
CNN은 국민투표를 시행하게 되면 메이 총리의 브렉시트 합의안, 노딜 브렉시트, EU 잔류 등 총 3개 선택지에 대한 투표가 이뤄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테리사 메이(가운데 빨간 재킷) 영국 총리와 유럽연합(EU)정상들. /조선DB |
④ ‘최악’의 경우 노딜 브렉시트
최악의 경우 EU와 아무런 합의 없이 결별하는 이른바 ‘노딜(no deal) 브렉시트’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메이 총리는 그동안 EU 회원국으로서 지켜야 할 의무는 면제받고 경제적으로는 EU와 통상관계를 유지하는 ‘소프트 브렉시트’를 추진해왔다. EU는 영국이 EU 단일시장과 관세동맹을 모두 포기하고 탈퇴하는 ‘하드 브렉시트’를 고수해왔으나 노딜 브렉시트 가능성을 우려해 영국과의 협상을 조심스레 진행해왔다.
그러나 이날 투스크 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은 "협상 기한이 얼마남지 않았기 때문에 노딜 브렉시트에 대비하기 위한 시나리오도 논의해야 한다"며 노딜 브렉시트 가능성을 경고했다.
노딜 브렉시트가 시행되면 산업·금융계에 막대한 피해가 예상된다. 영국 최대 자동차업체 재규어랜드로버 랄프 스페스 최고경영자(CEO)는 노딜 브렉시트 땐 수만 개의 일자리를 잃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영국 재무부는 노딜 브렉시트 시 영국 국내총생산(GDP)이 향후 15년간 7.7% 감소한다고 예상했다. 의약품과 식량, 생필품 공급이 중단되는 비상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다.
[이경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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