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1.17 (일)

순천만 물들인 ‘붉은 안녕’ 새해를 꿈꾸는 ‘겨울 손님’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대한민국 생태관광 1번지, 전남 순천

경향신문

순천만은 국내 유일한 흑두루미 월동 서식지다. 전 세계 1만3000여마리로 추정되는 흑두루미 중 10~20%가 한국에서 겨울을 난다. 순천시청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전남 순천은 대한민국 ‘생태관광’ 1번지다.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순천만 덕분이다. 세계 5대 연안습지로 꼽히는 순천만습지는 2006년 갯벌로는 국내 최초로 ‘람사르 습지’로 등록됐다. 드넓게 펼쳐진 갈대밭과 갯벌에서 자라는 수백종의 동식물 자체가 천혜의 관광자원이다. 순천시 전역은 지난 7월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으로 등재됐고, 10월엔 ‘람사르 습지 도시’로도 인증받았다.

덕분에 순천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관광객 900만명을 넘겼다. KTX가 다니며 서울(용산역)에서 2시간30분 거리로 좁혀진 것도 영향을 미쳤다. 순천시는 2019년을 ‘순천 방문의 해’로 선포하고 관광객 1000만명을 목표로 세웠다. 목표를 이뤄줄 귀한 손님 중 하나가 바로 멸종위기종 흑두루미(천연기념물 228호)다. 전 세계에 1만3000여마리로 추정되는 흑두루미 중 10~20%가 순천만에서 겨울을 난다. 매년 10월 중순 흑두루미가 순천만 갯벌에 처음 모습을 드러내면 일제히 언론 기사가 나올 정도로 관심거리다. 올해에는 지난 10월16일 첫 흑두루미가 관찰됐다. 12월 말은 개체수가 가장 많을 때다. 겨울 진객(珍客)을 만나러 지난 20일 순천으로 향했다.

■ 추수를 마친 논은 새들의 차지

순천만습지 입구에 들어서면서부터 ‘꾸르륵 꾸르륵’ 소리가 요란했다. 하늘 위에서 흑두루미가 여남은마리씩 짝지어 날아가고 있었다. 날개를 쭉 뻗은 기다란 몸뚱이가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보였다. 천문대와 순천만자연생태관, 연못을 거쳐 철새들이 먹이활동을 하는 논으로 다가갔다. 추수를 마친 논의 가까운 쪽은 쇠기러기와 청둥오리, 흰뺨검둥오리들의 차지였다.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수천마리 오리떼가 일순 하늘로 날아오르며 군무를 선보였다. 그 뒤로 흑두루미들이 멀리 보였다. 성큼성큼 걸으며 땅에 떨어진 볍씨를 주워먹는 모습이 아스라이 보였다.

더 가까이 흑두루미를 보기 위해 논을 내려다보는 위치의 탐조대에 올랐다. 2층 건물의 창에서 망원경으로 보니 흑두루미의 움직임이 바로 곁에 있는 듯 선명히 보였다. 소곤소곤 조심한다고 했는데도 사람 말소리에 놀란 듯 고개를 곧추 세우고 주위를 경계하는 녀석들이 여럿 눈에 띄었다. 원색 옷은 새를 놀라게 하니 피해야 한다는 탐조의 기본수칙도 몰랐던 무식을 속으로 탓했다. 200~300m나 떨어진 거리에서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걸 보며 ‘과연 영물이구나’ 생각도 들었다.

경향신문

순천시는 2009년 순천만습지 인근의 전봇대 282개를 뽑고 인근 식당과 농장을 철거하는 등 흑두루미 서식지 보호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올해도 순천만에 인접한 동천습지 근처 3개 양계 농장이 철새 보호와 AI(조류독감) 예방 등을 위해 자진 철거 의사를 밝혔다. 순천시청 제공


“흑두루미들은 시베리아에서 5월쯤 1차 번식을 하고 8월쯤 2차 번식을 해요. 순천만에 도착하는 10월 중순이면 태어난 지 불과 3~5개월밖에 안된 아기새를 데려오는 셈이니 얼마나 경계심이 많겠어요. 아기새는 키도 1m가 채 안되고 울 때도 삐익 삑 하는 병아리 같은 소리를 내요.”

흑두루미로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 중인 이승희 순천시청 주무관의 설명을 들으니 새들의 조심스러운 움직임이 더 잘 이해됐다. 순천시는 매년 습지 인근의 ‘흑두루미 희망농업단지’(약 60㏊)에서 재배한 친환경 유기농 쌀을 전량 구매해 흑두루미를 비롯한 철새들의 먹이로 제공하고 있다. 지역 주민들로 구성된 ‘흑두루미영농단’은 새들에게 안전한 서식지를 만들어주기 위해 일찌감치 추수를 마친 뒤 사람들의 농로 진입을 막고 겨우내 철새지킴이로 활동한다.

전 세계 흑두루미 몰리는 순천만서

수천마리 날아오르는 군무 보고

노을로 붉게 물드는 와온마을서

이맘때 제일 맛 좋은 새꼬막 먹고

낙안읍성서 조선시대 풍경 거닐며

선암사까지 들렀다 차 한잔 하시죠


경향신문

1996년 처음 70여마리가 발견된 이래 순천만에서 월동하는 흑두루미 개체수는 꾸준히 늘고 있다. 올해는 지난 19일 기준 2538마리로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 김형규 기자


이런 노력 덕분에 순천만을 찾는 흑두루미 숫자는 매년 늘고 있다. 1996년 70여마리가 처음 발견된 후 2000년대 들어 수백마리 수준을 유지하다 2015년 1000마리를 넘겼고 지난해 2176마리가 순천만에서 겨울을 났다. 지난 19일 기준 순천만에 머무는 흑두루미는 2538마리로 역대 최고 기록을 세웠다. 어떻게 1마리 단위까지 마릿수를 알고 있을까. 흑두루미는 삵 등 천적을 피해 갯벌에서 잠을 자고 날이 밝으면 다시 먹이를 찾아 논으로 일제히 날아오는데 그때 망원경으로 길목을 살피며 일일이 숫자를 센다고 한다. 8명의 모니터링단이 번갈아가며 깜깜한 새벽부터 산꼭대기에 올라 추위와 싸우며 흑두루미 숫자를 세는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사소해 보이는 일상의 작은 부분에도 언제나 타인의 보이지 않는 노력이 숨어 있음을 여행은 문득문득 깨닫게 한다.

경향신문

순천은 자연과 하나되는 생태여행의 정수를 맛볼 수 있는 곳이다. 흑두루미를 비롯한 겨울 철새를 만나러 갈 때는 말소리를 낮추고 원색 옷은 피하고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 등 탐조 수칙을 지켜야 한다. 김형규 기자


순천만을 누비던 흑두루미들은 겨울을 난 뒤 이듬해 4월1일 만우절이 되면 거짓말처럼 자취를 감춘다. 3월 말쯤 모두 시베리아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난해엔 플라스틱 조각을 먹이로 알고 쪼았다가 부리가 묶인 암컷 흑두루미 한 마리가 죽는 일이 있었다. 그 짝으로 보이는 수컷 한 마리가 4월이 돼서도 죽은 흑두루미가 마지막 자취를 감춘 야생동물구조센터 건물 주위를 뱅뱅 돌다가 뒤늦게 돌아간 일이 있었다고 한다. 한 번 짝을 맺으면 평생 해로한다는 흑두루미의 부부애에 감탄했고, 그런 아름다운 피조물의 삶을 비극으로 만드는 인간의 무심함에 가슴을 칠 수밖에 없었다.

기자가 들른 탐조대는 현재 일반에 개방하고 있지 않지만 습지 내 천문대에 설치된 무료 망원경으로도 흑두루미를 생생히 관찰할 수 있다. 순천만습지 홈페이지에서 예약하면 매년 3월까지 운영하는 탐조 프로그램에도 무료로 참여할 수 있다. 탐조 프로그램은 하루 2회, 주 5일 운영된다. 1박2일짜리 주말 프로그램도 있다.

■ 낙안읍성 일출의 비현실적 아름다움

순천만습지에서 흑두루미를 보고 난 뒤 인근의 순천문학관역에서 소형무인궤도차(PRT) ‘스카이큐브’를 타면 12분 만에 순천만국가정원에 닿는다. 순천만국가정원은 2013년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가 폐막한 후 박람회장을 개조해 만든 거대한 공원이다. 축구장 150개 넓이 부지에 500여종의 나무와 110여종의 꽃이 아름답게 장식된 녹지다.

한겨울에 무슨 꽃이냐 싶겠지만 겨울정원의 매력이 따로 있다. 흰말채나무의 붉은빛 수피와 황금측백, 조릿대의 연노란 이파리는 찬바람에도 화려한 색을 뽐낸다. 애기동백은 2월이 돼야 피는 동백과 달리 11월부터 겨울 내내 꽃을 피우는데 꽃송이 전체가 툭 떨어지는 게 아니라 꽃잎이 한 잎 한 잎 떨어지는 것도 동백과 달라 보는 맛이 있다. 순천만국가정원이 일종의 그린벨트처럼 도심이 순천만습지까지 퍼지는 걸 막아내는 ‘에코 라인’ 역할을 한다는 설명까지 듣고 나면 정원 풍경은 더 정겹게 느껴진다.

경향신문

순천만에 자리잡은 와온마을 앞바다 꽃섬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낙조는 세밑을 보내는 여행의 마무리로 제격이다. 김형규 기자


순천만을 돌며 하루를 보냈다면 마무리는 와온마을에서 하는 게 좋겠다. 꽃섬을 배경으로 붉은 해가 떨어지며 하늘은 물론 갯벌까지 온통 붉은 그림자로 물들어가는 풍경은 한 해를 떠나보내는 장면으로 삼기에 부족함이 없다. 와온마을은 꼬막 산지로도 유명하다. 꼬막 하면 벌교를 떠올리지만 벌교는 참꼬막이고 와온은 새꼬막의 전국 최대 산지다. 꼬막은 겨우내 잡아 먹는데 이맘때부터 2월까지가 가장 맛있는 기간이다. 올해는 꼬막 생산량이 예년보다 크게 늘며 가격도 떨어져 부담 없이 즐기기 좋다.

경향신문

성곽에 올라 바라보는 동틀녘의 낙안읍성은 시간여행을 떠난 듯 몽환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김형규 기자


순천까지 와서 낙안읍성과 선암사를 빼놓고 가면 섭섭하다. 낙안읍성은 객사와 동헌, 마을의 구성까지 조선시대 계획도시의 전형을 보여주는 민속마을이다. 지금도 사람이 살고 있다. 한때 200여가구가 거주했지만 지금은 108가구 270여명이 생활을 꾸리고 있다. 조선시대 풍경을 그대로 간직한 마을을 무대로 사극이나 영화를 촬영하러 오는 일도 잦다.

나지막한 돌담길을 걸으며 구석구석 산책하다 보면 마음이 푸근해지고 시간여행을 떠난 것 같은 재미도 느낄 수 있다. 낙안읍성이 가장 근사한 모습을 보여주는 때는 동틀 녘이다. 마을 어귀에서부터 한 집 두 집 초가지붕 사이로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고 멀리 오봉산 산등성이 너머로 아침해가 천천히 얼굴을 드러내는 모습은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의 극치다. 서문 근처 성곽길 언덕에서 내려다봐야 마을 전체를 조망하며 일출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

경향신문

이른 아침부터 방송사 사극 촬영이 한창인 낙안읍성. 김형규 기자


올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선암사는 절집으로 향하는 입구의 숲길이 가을이면 아름다운 단풍 터널을 만드는 것으로 유명하다. 지금은 단풍이 없지만 계곡을 가로지르는 승선교(보물 400호)의 아치 사이로 우람한 누각 강한루가 보이는 그림 같은 풍광은 그대로다.

선암사에 들렀다면 내려오는 길에는 야생차체험관을 꼭 들르길 추천한다. 순천은 차 재배 농가가 174집이나 되는, 보성이나 하동에 뒤지지 않는 차 생산지다. 순천은 뿌리가 2~4m에 이르는 야생차로 유명하다. 비료나 농약 없이 키운다. 체험관에선 단돈 3000원에 다식과 차례를 경험할 수 있다.

차를 다 마시고 난 뒤 빈 숙우(다도(茶道)에서 끓인 물을 식히는 대접)에 얼굴을 갖다 대니 따뜻한 기운과 함께 달달한 향이 났다. 마음도 차분해졌다. 한국에서 차 문화는 곧 선비와 스님의 문화였다. 차가 마음을 다스리고 수양하는 한 방편이었다는 설명이 쉽게 와닿았다.

경향신문

선암사 들머리의 승선교와 강한루. 김형규 기자



경향신문

선암사 올라가는 길에 자리잡은 순천전통야생차체험관. 김형규 기자


순천 | 김형규 기자 fidelio@kyunghyang.com

최신 뉴스두고 두고 읽는 뉴스인기 무료만화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