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판에서 차를 몰고 풍경을 즐기며 천천히 드라이브 하다 보면 곳곳에서 ‘인생샷’을 찍을 수 있는 포인트를 만나게 된다. 도로가에 길게 가지를 뻗은 플레임 트리도 훌륭한 배경이다. 김형규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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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한 여행은 싫다. 비싼 돈 주고 외국까지 가서 남들 다 가는 관광지만 쳇바퀴 도는 건 상상 못할 일이다. 그런데 여행지가 사이판처럼 작은 섬이라면 선택지가 많지 않다. 마나가하섬, 만세절벽, 그로토, 새섬… 도장 찍듯 지역 명소를 순례하는 공장식 여행을 벗어나기 쉽지 않다. 물론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사전 조사를 열심히 하고 발품을 팔아 새로운 장소를 찾아내면 된다. 누구나 생각은 하지만 막상 하려면 귀찮고 힘든 일, 그걸 대신 해보겠다는 생각으로 사이판에 다녀왔다.
■금단의 섬에서 호젓한 물놀이
사이판은 섬 서쪽에 마을이 발달했다. 산호초가 파도를 막아주는 앞바다는 물결이 잔잔하고 경치도 아름답다. 주요 관광지와 호텔·리조트도 서해안에 몰려 있다. 반면 섬 동쪽 바다는 세계에서 가장 깊다는 마리아나 해구의 끝부분으로 수심이 1만m가 넘는다. 조류와 파도가 강해 사람의 발길이 뜸하다. 대신 때 묻지 않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포비든 아일랜드는 레이건 대통령 시절 미 CIA의 훈련장소로 사용되며 한동안 주민들의 출입이 금지됐고 그때부터 ‘금단의 섬’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김정근 선임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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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판 동부 해안 끄트머리에 매달린 ‘포비든 아일랜드’(Forbidden Island)는 제주 성산일출봉을 축소한 것 같은 작은 섬이다. 4륜구동 차를 타고 울퉁불퉁한 길을 한참 오르면 언덕 위 전망대에서 섬을 조망할 수 있다. 푸르른 녹음과 광막한 대양이 어우러진 풍경에 가슴까지 시원해진다.
언덕 위 전망대에서 포비든 아일랜드까지 접근하려면 가파른 산길을 30여분 내려가야 하지만 시원한 바닷바람과 눈에 들어오는 절경이 고생을 잊게 만든다. 김정근 선임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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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 여행사에선 언덕을 내려가 섬 바로 앞까지 트레킹을 즐기는 투어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코스는 때로 밧줄을 잡고 내려가야 할 정도로 가파르지만 바닷바람을 맞으며 길섶의 들꽃을 구경하다 보면 어느새 산호가 곱게 깔린 해변에 닿는다. 녹색 이끼가 낀 검은 바위 위로 파도가 부서지며 작은 물방울들이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모습은 ‘신령스러운 장소’라는 섬사람들의 말 그대로다.
포비든 아일랜드와 해안을 잇는 갯바위 틈은 스노클링 하기 좋은 천연 수영장이다. 물 속엔 형형색색의 물고기 천지다. 김정근 선임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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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 가이드 알리 크루즈(37)는 “냉전이 한창이던 1980년대 레이건 행정부 때 미 중앙정보국(CIA)의 군사훈련 장소로 쓰이면서 주민들의 출입이 금지됐고 그때부터 ‘금단의 섬’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했다.
인기척에도 놀라지 않고 가까이 다가오는 물고기들. 김형규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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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과 해안을 연결하는 갯바위 틈은 파도가 미치지 않는 자연 수영장으로 스노클링을 즐기기 좋다. 준비해 간 스노클 장비를 차고 물에 뛰어들자 크고 작은 물고기 천지였다. 확실히 인적이 드문 곳이라 그런지 물고기들이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고 얼굴로 똑바로 다가오는 게 신기했다.
비밀의 동굴은 현지인들조차 이름은 들어봤어도 정확한 위치는 잘 모르는 숨겨진 명소다. 현지 여행사 투어상품으로 포비든 아일랜드와 비밀의 동굴을 둘러보는 트레킹을 경험할 수 있다. 김정근 선임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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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의 섬 옆으로 바위투성이 너덜길을 10여분 오르면 현지인들도 잘 모르는 ‘비밀의 동굴’이 나온다. 지하로 뚫린 입구로 한 발씩 딛고 내려가면 커다란 바위 틈으로 빛이 새어들고 아래로는 민물과 바닷물이 섞인 투명한 웅덩이가 있어 물놀이를 즐기기 딱이다. 금단의 섬과 비밀의 동굴은 흔치 않은 비경이지만 혼자 찾아가기 쉽지 않고 시시각각 변하는 바다도 위험할 수 있다. 꼭 현지 사정을 잘 아는 가이드와 함께 방문하길 권한다.
■쏟아질 듯한 별 담기
어두워지면 불빛 드문 해안가로 나가보자. 사이판에서 별이 쏟아질 듯 총총히 박힌 하늘을 발견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일부 여행사·호텔은 한밤에 별을 보러 가는 ‘별빛투어’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도 한다. 대개는 섬 북쪽 끝 만세절벽(Banzai Cliff)으로 향한다. 하지만 유명한 장소엔 늘 사람이 몰린다. 가보면 자동차 불빛과 이미 자리 잡은 사람들의 소란에 별 구경할 기분이 싹 사라진다. 자살절벽(Suicide Cliff)은 만세절벽과 달리 주변에 건물이나 기념비처럼 시야를 가리는 방해물도 없고 산꼭대기라 탁 트인 하늘을 맘 편히 즐길 수 있다. 같은 이유로 자살절벽은 일출 감상 명당이기도 하다.
야트막한 산 정상에 있는 자살절벽에서 바라본, 별이 가득한 사이판의 밤하늘. 김정근 선임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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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드 없이 가면 멀뚱히 하늘만 쳐다보다 오는 것 아니냐고? 별자리 이름 하나 모르는 ‘별알못’이라도 상관없다. 스마트폰 하나면 다 해결되는 시대 아닌가. ‘Star Walk’ 같은 별자리 안내 애플리케이션을 다운로드받아 실행해보자. 스마트폰 카메라를 밤하늘에 갖다 대면 자동으로 화면에 별자리 그림이 이름과 함께 그려진다. 머리 위로 왼쪽에 가장 빛나는 별은 화성, 그 밑으로는 해왕성 이름이 떴다. 오른쪽 방향으로는 사다리꼴 무늬가 선명한 페가수스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손에 든 스마트폰을 천천히 돌리자 안드로메다, 카시오페이아, 황소자리, 오리온자리, 토끼자리 등 익숙한 이름의 별자리들이 차례로 펼쳐졌다.
별 사진을 찍을 때는 사람이나 나무를 화면 구석에 걸고 찍으면 초점 잡기도 쉽고 밋밋한 사진에 포인트를 줄 수 있다. 김정근 선임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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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으로만 담아도 충분히 아름답지만 별 가득한 하늘을 사진으로 남기는 것도 특별한 추억이다. 남들이 SNS에 올린 별 사진을 보고 어떻게 찍었냐고 댓글 달며 부러워만 하지 말고 직접 찍어보자. DSLR 카메라와 삼각대만 있으면 누구나 쉽게 도전할 수 있다. 네 가지만 기억하면 된다. 일단 별 사진은 수동 모드로 촬영해야 한다. 조리개는 최대한 열고 셔터스피드는 15~20초로 설정한다. 둘 다 빛을 많이 끌어모으기 위한 방법이다. 마지막으로 ISO를 3200 정도에 맞추자. ISO 수치를 높이면 어두운 곳에서도 선명한 사진을 찍을 수 있다. 대신 사진에 먼지 같은 노이즈가 생길 수 있으니 카메라에 노이즈 감소 기능이 있다면 켜두자. 나무나 사람을 화면 구석에 걸고 찍으면 초점을 잡기도 쉽고 밋밋한 사진에 포인트를 줄 수 있다.
■드라이브하며 인생 샷을
사이판은 길이 복잡하지 않고 차량도 많지 않아 운전이 수월하다. 해변을 따라 남쪽에서 북쪽까지 섬을 일주하는 데 30여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천천히 풍경을 즐기며 드라이브를 하다 보면 섬 곳곳에서 ‘인생샷’을 건질 수 있는 장소가 튀어나온다.
사이판 섬 가운데 자리잡은 타포차우 산 정상에선 섬 전체를 360도 조망할 수 있다. 정상까지 올라가는 비포장길이 험해 SUV를 타고 가야 한다. 김정근 선임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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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북쪽 파우파우 비치에서 만세절벽으로 향하는 미들로드(Middle Road)와 자살절벽으로 올라가는 언덕길이 대표적이다. 1차선 도로 양쪽으로 사이판에 흔한 ‘플레임 트리’(Flame Tree·일명 불꽃나무)가 도열해 있는데, 사방으로 가지를 뻗은 우람한 나무 아래 원색의 스포츠카를 대놓고 보닛 위에 올라가 포즈를 취하면 모델이라도 된 기분이 든다.
사이판 남부 해안가의 식당 ‘서프 클럽’(Surf Club)은 맛집으로도 유명하지만 바로 앞 해변에서 감상하는 석양이 아름답기로 손꼽힌다. 김정근 선임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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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판 중심가인 가라판 시내에 인접한 마이크로 비치도 일몰 때면 해 지는 장면을 카메라에 담으려는 관광객들로 늘 붐비는 곳이다. 김정근 선임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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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진 관광지도 한 뼘만 더 들어가면 남들은 모르고 지나가는 깨알 같은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먼저 짙푸른 바다가 넘실대는 해식동굴 그로토(Grotto). 급경사의 107개 계단을 조심조심 내려가면 거대한 바위절벽 아래로 암초가 삐죽 머리를 내밀고 있고 주변으로 그득그득 파도가 물밀어오는 풍경 자체가 멋진 곳이다. 대부분은 여행사 상품으로 스노클링 체험을 하러 그로토를 찾는다. 하지만 파도가 센 편이고 수면에서 관찰할 수 있는 물고기도 많지 않아 추천하고 싶지 않다.
그로토는 특유의 물빛과 독특한 해저 지형 덕분에 북마리아나 제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쿠버다이빙 포인트로 꼽힌다. 다이브Y2K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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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토의 매력을 제대로 느끼려면 스쿠버다이빙을 해야 한다. 그로토는 사이판을 포함한 북마리아나 제도에서 가장 유명한 스쿠버다이빙 포인트다. 물속으로 들어가면 외해(外海)로 뚫린 3개의 해저 동굴이 있다. 동굴 안 푸른 바닷물 위로 한 줄기 빛이 새어드는 모습은 더없이 몽환적이다. 물속은 가시거리 20~30m로 깨끗하다. 동굴을 빠져나가 밖으로 나가면 커다란 산호초 군락과 형형색색의 물고기들이 반긴다.
그로토에서 스쿠버다이빙을 즐기는 김형규 기자. 다이브Y2K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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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드라이브 삼아 많이들 들르는 새섬(Bird Island). 보통은 석회암으로 이뤄진 자그만 섬과 새의 날개처럼 생긴 아름다운 해안선을 잠시 감상한 뒤 기념사진을 찍고 빠지는 곳이다. 포장도로도 그곳에서 끝나니 대부분 5~10분 만에 돌아 나온다. 하지만 잘 보면 도로 끝에 ‘칼라베라 동굴’(Kalabera Cave)이라고 쓴 표지판이 있다. 이어진 비포장길을 5분쯤 달리면 동굴에 닿는다. 동굴 가는 길은 그리 험하지 않으면서도 흙먼지 휘날리며 달리는 오프로드 드라이빙의 매력을 만끽할 수 있다.
칼라베라 동굴 입구의 차모로족 전통 가옥. 김형규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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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라베라 동굴은 스페인 통치 시대에 차모로인을 가두는 감옥으로 사용됐고 2차 세계대전 때는 야전병원으로도 쓰였다. 10m가 넘는 동굴 입구에 서기만 해도 으스스한 기분과 서늘한 한기에 더위가 싹 가신다. 동굴 입구엔 원두막처럼 생긴 차모로족 전통 가옥이 있는데 대나무살로 짠 바닥에 누워 쉬어가기 좋다.
섬 둘레로 한적한 해변이 널려 있는 사이판이지만 관광객들은 대부분 숙소 앞 바닷가나 잘 알려진 해변만 왔다 갔다 할 뿐이다. 사이판 현지인들이 가족·친구들과 즐겨 찾는 해변은 따로 있다. 대부분 수풀 우거진 비포장도로를 달려가야 해 렌터카로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을 빌려두는 게 좋다. 사이판에선 국제운전면허증 없이 국내에서 쓰던 운전면허증만 갖고도 차를 빌리고 운전할 수 있어 더 편하다. 스마트폰으로 구글맵을 켜고 목적지를 입력한 뒤 ‘길찾기’ 버튼을 누르면 한국어로 안내하는 내비게이션이 작동되니 길 잃을 염려도 없다.
호젓한 바닷가에서 여유로이 시간 보내기 좋은 윙 비치. 김정근 선임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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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서부 해안에 있는 윙 비치(Wing Beach)는 여름이면 바다거북이 찾아와 알을 낳는 청정지역이다. 너른 백사장은 언제 찾아도 사람이 드물다. 연인과 단둘이 해수욕을 즐기고 지는 해를 바라보며 은밀한 데이트를 즐기고 싶다면 메모해둘 이름이다.
동굴 안에서 바라본 래더 비치. 김정근 선임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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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남쪽 공항 근처 래더 비치(Ladder Beach)와 오브잔 비치(Obyan Beach)는 파도에 닳아 별 모양이 된 산호 조각이 잔뜩 깔린 모래사장이 특히 아름답다. 래더 비치는 100m 남짓한 작은 해변인데 백사장 뒤편에 넓게 트인 동굴이 있어 쉬기도 놀기도 좋다. 현지인들은 동굴 그늘에서 종종 바비큐 파티를 벌인다. 동굴 안에서 해변을 배경으로 실루엣만 나오게 찍은 사진은 딱 SNS용이다.
오브잔 비치로 가는 길에 만난 ATV. 김정근 선임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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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더 비치에서 좀 더 들어가면 기다란 백사장이 2~3㎞ 이어진 오브잔 비치다. 수심이 얕고 파도가 잔잔한 데다 가끔 출몰하는 장어 떼를 만날 수도 있어 인기 있는 스노클링 포인트다. 맑은 날엔 해변에서 멀리 티니안섬까지 내다보인다.
사이판 켄싱턴호텔. 김정근 선임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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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0월 태풍 ‘위투’가 강타한 사이판은 현재 복구 작업이 거의 완료된 상태다.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었던 섬 북부는 예전의 모습을 되찾았다. 사이판 켄싱턴호텔은 섬 남쪽의 다른 리조트들보다 복구가 빨라 이미 정상 운영되고 있다. 인피니티 풀을 포함한 세 개의 수영장과 바다 위 놀이시설인 ‘아쿠아 파크’,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코코몽 캐릭터로 꾸민 키즈 카페와 남녀노소 즐길 수 있는 액티비티 공간까지 편의시설을 두루 갖춘 ‘올인클루시브’ 호텔이다. 2016년 여름 개장해 시설과 인테리어도 사이판에서 보기 드물게 깔끔하고 고급스럽다. 하루 세끼를 뷔페·중식·일식·야외 바비큐 등 메뉴에 따라 여러 개의 레스토랑에서 골라 먹을 수 있고, 한국 기업(이랜드)이 운영하는 호텔답게 음식도 한국인 입맛에 잘 맞아 추천할 만하다.
켄싱턴호텔 객실에서 바라본 쌍무지개. 김정근 선임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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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판(미국) | 김형규 기자 fideli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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