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 프라하
해질 녘의 카렐교 위에서 붉게 물들어가는 블타바강을 바라보노라면 누구라도 로맨틱한 감정에 젖어들게 된다. 거리의 악사들은 연인들의 밀담이 행여 들킬세라 흥겨운 곡조를 소리 높여 연주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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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했어, 예뻐서
어딜 가도 ‘그림’이 되는 도시
‘맥주가 물보다 싼 나라.’ 그 말이 사실이라면 나는 이민을 고려할 것이다. 이미 마음은 블타바 강가의 맥줏집에서 커다란 유리잔을 호방하게 부딪치고 있었다. 여행물가가 싼 것도 체코의 매력이다. 방이 두 개 딸린 도심의 아파트를 1박에 10만원에 빌렸다.
3월의 여행을 사랑한다. 숫자로는 1월이 시작하는 달이지만 3월이야말로 깨어나는 달이다. 여행 비수기여서 비행기 값도 싸고 공항은 한적하며 캐리어는 가벼워진다. 연둣빛이 천지사방에 솟아나니 마음에도 꽃이 핀다. 프라하의 봄이었다.
카렐교의 아침 풍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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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헤미안 랩소디’로 익숙한 ‘보헤미아’의 어원을 찾아봤더니 뜻밖에 체코가 있다. 보헤미아는 1918년 체코슬로바키아로 묶이기 전까지 체코 서부에 위치한 어엿한 왕국이었다. 보헤미아 지방에는 유랑민족인 집시가 많이 살았고 15세기 프랑스인들이 그들을 ‘보헤미안’이라고 불렀다. 체코는 크게 보헤미아, 모라비아, 실레시아 세 지역으로 나뉜다. 역사적인 구분일 뿐이고 행정적으로 똑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보헤미아 지역은 체코의 서쪽, 체코 넓이의 약 60%를 차지한다. 수도 프라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도시 체스키크룸로프, 필스너의 고향인 플젠이 모두 보헤미아에 위치한다.
프라하에 막상 가보면 이웃 나라인 헝가리나 불가리아 도시에 비해 보헤미아의 감성은 덜하다.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방랑자들이 살았을까 싶을 정도로 귀족적이며 우아하다. 20세기 역사적으로 굵직한 사건을 겪으면서 어수선했던 도시가 차차 정돈되었기 때문이다.
프라하 거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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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의 바츨라프 하벨 공항에 도착했다. 체코의 민주화를 이끈 대통령, 바츨라프 하벨의 이름을 딴 공항이다. 공산주의체제 속에서 잠깐 언론, 집회, 출판의 자유가 보장됐던 1968년 ‘프라하의 봄’은 짧았다. 자유화운동이 일어났던 바츨라프광장은 잔디공원을 중심으로 인도와 차도가 분리되어 있어서 광화문광장과 형태가 비슷하다. 공간이 간직한 이야기 덕분에 한국인에게는 더 각별하게 느껴진다. 1992년 소련이 해체되면서 진정한 봄을 맞이하기 전까지 프라하는 길고 추운 겨울을 보내야만 했다. 그러니 ‘프라하의 봄’은 슬픈 말이다.
존 레넌 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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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피티로 유명한 존 레넌 벽은 역사의 현장이다. 체코의 자유가 억압돼 있던 1980년대, 자유를 열망하던 프라하의 젊은이들이 몰타 대사관 벽에 존 레넌의 노랫말과 사회 비판 메시지를 남겼다. 몇 년 전엔 전 대통령의 탄핵을 촉구하는 글귀가 한국어로 쓰여 있기도 했다. 그 위에 고백과 하트가 덧대어진 존 레넌 벽은 지금은 사라졌지만 오랜 시간 동안 프라하 사람들의 대자보였다.
캄파섬 난간에 걸린 자물쇠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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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에서 멍하니 걷다 보면 어느 순간 마법처럼 카렐교에 닿는다. 카렐교는 본래 블타바강의 양쪽 교역을 위해 마차가 다니는 길이었지만, 지금은 완벽히 보행자 전용 다리다. 해질 녘, 붉은빛을 머금은 강을 내려다보면서 저 수많은 연인들은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걸까. 거리의 악사는 밀담이 들킬세라 음악을 더했다. 카렐교 아래 캄파섬의 작은 수로는 마치 베네치아의 미니어처 같다. 수로 위 난간에는 알록달록한 자물쇠들이 달려 있다. 사랑은 자물쇠처럼 걸어 잠근다고 변하지 않는 것은 아닐 텐데. 약속이 영원할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여행자들의 눈길을 끄는 데는 성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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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품 상점에서 마리오네트 인형을 볼 때마다 조금은 서글퍼졌다. 얇은 관절이 덜렁거리고 누군가의 조작으로 움직이는 무기력한 존재. 구시가지에서 우연히 마리오네트 국립극장을 발견했다. 유서 깊은 국립극장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낡은 외관에 당황했다. 내가 본 인형극은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조반니’였다. 이탈리아어로 진행되기 때문에 내용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문제 되지는 않았다. 슬랩스틱 코미디는 전 세계 공용어라 대강 이해가 되는 데다 무엇보다도 인형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손에 집중하다보면 공연시간 1시간은 금세 지난다. 예상보다 초라한 공연이지만 마리오네트 인형극은 엄연히 세계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인형극 그 이상의 의미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16세기 체코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편입된 이후 체코의 귀족과 부르주아들은 사대주의에 젖어 독일 문화를 받아들이고 독일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반면 민중들은 체코어를 고집하면서 마리오네트 공연을 통해 시대를 풍자했다. 마리오네트 인형극은 체코의 정체성을 담았다.
프라하 광장의 악사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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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를 걸으면 몽롱한 기분까지 든다. 낮에는 고풍스러운 분위기에 취하고, 매일 밤 맥주에 취한다. 도심을 휘감아 도는 트램은 탈탈거리는 소리를 내며 생기를 불어넣는다. 일부 구형 트램은 북한에 수출된 적도 있다니 프라하의 흔적을 언젠가 평양에서 찾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럽 중세도시가 대개 그렇듯 프라하의 중심에는 강이 흐르고 강변을 따라 시간의 더께가 쌓인 건물들이 이어져 있다.
프라하성은 세계에서 가장 큰 고성이다. 입구는 예상 밖으로 경계가 삼엄하다. 배우로 전직해도 될 만한 수려한 외모의 체코 여성 경찰이 입구에서 가방검사와 몸 수색을 하는 것은 그다지 기분이 나쁘지 않다. 워낙 사람이 많아 이끌리듯 성으로 빨려 들어갔다. 꼬박 하루를 프라하성에서 할애하고 말았다. 가난한 금세공사가 모여 살던 황금 소로라는 좁은 골목은 지금 말끔하게 정돈돼 기념품 가게나 카페 등으로 사용된다. 체코는 예로부터 손재주가 좋고 공산정부 시절에도 동유럽에서 가장 기계공업이 발달했던 나라다. 세밀한 커팅으로 유명한 보헤미아 글라스가 명품으로 대접받는 이유다. 상점에 들어갔더니 찻잔 하나에 20만원이 넘어 조심스럽게 제자리에 놓고 말았다.
비셰흐라드 공동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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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하진 않지만 꼭 추천하고 싶은 곳이 있다. 비셰흐라드(Vysehrad) 공동묘지다. 체코의 작곡가 드보르자크를 비롯해 유명 인사들이 잠들어있다. 뾰족한 네오 고딕 양식의 성당 옆으로 묘지가 빼곡하다. 봄의 기운이 솟아난 묘지 사이로 사람들은 산책을 즐겼다. 작곡가의 묘비에는 음표가, 피아니스트의 묘비에는 두 손이, 화가의 묘비에는 붓이 그려져 있다. 체코어를 하나도 몰라도 고인의 삶을 대강 추측할 수 있다. 산 자들은 죽은 자가 누운 자리에 꽃을 심었고, 돌을 모아 하트를 만들었고, 양초와 인형 같은 선물을 올려놓았다. 다다미방처럼 오와 열을 맞춰 놓은 일본의 공동묘지나 묘비명을 보지 않으면 누구의 것인지 당최 알 수 없는 우리나라 공동묘지와는 다른, 보헤미안적 자유로움이 풍긴다. 동네 한가운데 묘지가 있다는 것도 좋았다. 어차피 누구나 맞이하게 될 죽음, 그다지 슬프지도 않게 그리고 예쁘게 기리는 낙천성에 미소가 지어진다.
프라하 구시가지의 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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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했지, 감성에
맥주를 사랑하는 시민들
자, 이제 맥주의 시간이다. 어수선한 길에서 아주 고급스럽지도, 아주 허름하지도 않은 맥줏집에 들어갔다. 손님도 바글바글하니 제대로 찾은 것 같다. 체코식 족발인 콜레뇨(Koleno)와 필스너 우르켈을 시켰다. 황금빛 맥주는 벌컥벌컥 잘도 넘어간다. 보리의 고소함과 홉의 쓴맛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뤘다. 콜레뇨 한가운데 푹 꽂아놓은 칼로 살점을 부드럽게 도려내 입안 가득 채워 넣었다. 우리 족발보다는 껍질이 조금 더 단단하고 독일식 족발인 학센보다는 부드럽다. 콜레뇨와 맥주는 실패할 일이 없는 페어링이다.
체코 국민맥주 ‘필스너우르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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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공장 종업원 출신인 하벨 대통령은 영국의 록그룹 롤링스톤스가 방문했을 때도 맥줏집에서 필스너 우르켈을 마셨을 만큼 맥주 사랑이 각별했다. 우르켈(Urquell)은 오리지널(original)이라는 뜻이다. 필스너 우르켈은 고급 레스토랑에서도 한 잔에 2500원이 넘지 않으니 부담이 없다. 마트에 가보니 필스너 병맥주 하나에 25코루나 정도, 한화로 1500원이 되지 않는다. 물은 1000원 정도였으니 실제로는 맥주가 비싼 셈이다. 하지만 애주가 입장에서 보자면 심정적으로 체코 맥주는 물보다 싸다. 이민을 잠시 고려했다. ‘맥주 값을 올리는 나라는 망한다’는 체코 속담은 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프라하의 봄과 여행에 나즈드라비(Na zdravi, 건배)!
■여행정보
국민 1인당 1년에 302캔…체코 맥주 소비량, 한국 3배
독일이 맥주로 유명하지만, 1인당 맥주를 가장 많이 마시는 나라는 체코다. 2016년 통계에 따르면 체코 국민 1인이 연간 143ℓ의 맥주를 마신다. 캔으로 따지면 1인당 302캔이다. 한국인 1인당 소비량(45.8ℓ)의 3배가 넘는다.
추천하고 싶은 프라하 명소 = 카프카가 없는 프라하도 상상하기 어렵다. 카프카는 체코에서 태어났으면서도 독일어로 말하고 글을 썼으며, 핏줄은 유대인이었다. 유대인지구에서 유대인 핍박의 역사를 접하고 카프카박물관에서 카프카의 고독을 마주하면 프라하의 다른 얼굴이 보인다.
국민 1인당 1년에 302캔…체코 맥주 소비량, 한국 3배
카프카뮤지엄 |
독일이 맥주로 유명하지만, 1인당 맥주를 가장 많이 마시는 나라는 체코다. 2016년 통계에 따르면 체코 국민 1인이 연간 143ℓ의 맥주를 마신다. 캔으로 따지면 1인당 302캔이다. 한국인 1인당 소비량(45.8ℓ)의 3배가 넘는다.
체스키크룸로프 |
추천하고 싶은 프라하 명소 = 카프카가 없는 프라하도 상상하기 어렵다. 카프카는 체코에서 태어났으면서도 독일어로 말하고 글을 썼으며, 핏줄은 유대인이었다. 유대인지구에서 유대인 핍박의 역사를 접하고 카프카박물관에서 카프카의 고독을 마주하면 프라하의 다른 얼굴이 보인다.
추천하고 싶은 주변 도시 = 프라하와 묶어 여행하기 좋은 도시는 체스키크룸로프(Cesky Krumlov)다. ‘체코의 오솔길’이라는 뜻처럼 어여쁘고 작다. 프라하에서 버스로 2시간30분 정도 걸린다.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다. 거미줄처럼 이어진 골목과 에곤 실레의 예술적 감성에 취하다보면 하루 이틀은 금세 지난다. 보헤미아 감성은 프라하보다 짙다.
▶필자 김진
회사 홍보팀에서 십여년 근무하다가 여행을 좋아해 여행작가가 되었다. 취미가 직업이 되면 안 좋다고들 하지만 좋아하는 것을 두루 누릴 수 있어서 여전히 행복하다. 여행과 글이 삶을 풍요롭게 한다고 믿는다.
회사 홍보팀에서 십여년 근무하다가 여행을 좋아해 여행작가가 되었다. 취미가 직업이 되면 안 좋다고들 하지만 좋아하는 것을 두루 누릴 수 있어서 여전히 행복하다. 여행과 글이 삶을 풍요롭게 한다고 믿는다.
김진 |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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