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션촌과 10km 떨어진 인적드문 ‘無人 펜션’
마을 주민들 ‘고유정’ 말만 꺼내도 손사래
지난 15일 오전 제주시 한 펜션. 10여 가구가 사는 마을 끝 막다른 골목에 1층짜리 건물이 한 채 있다. 간판이 따로 없어 얼핏 보기엔 일반 가정집 같았다. 낮은 울타리 뒤로 자그마한 마당이 있고, 군데군데 핀 붉은 꽃에는 전날 내린 빗방울이 맺혀 있었다.
고유정(36)씨가 지난달 25일 아들(6)을 만나러 온 전 남편 강모(36)씨를 살해한 장소로 지목된 펜션이다. 고씨는 이곳에서 강씨를 흉기로 찔러 살해하고, 이틀 동안 그의 시신을 훼손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살인 사건이 일어났던 곳이라 상상하기 어려울만큼 이곳 펜션은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15일 오전 ‘고유정 사건’이 발생한 펜션의 문이 닫혀있다. /권오은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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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과 대면할 필요 없는 ‘無人 펜션’
이 펜션은 '무인(無人) 운영'돼 왔다. 예약한 사람들이 미리 현관문 비밀번호를 받아 알아서 사용하고 떠나면 되는 시스템이다. 주인과 직접 만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고씨도 범행 전 펜션 예약을 직접 했다. 제주도가 고향인 고씨가 왜 이곳을 범행 장소로 정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만한 대목이었다.
펜션 입구에는 폐쇄회로(CC)TV가 설치돼 있지만, 촬영·녹화가 안 되는 가짜 CCTV였다. 고씨가 드나드는 장면을 촬영한 영상은 펜션 인근에 설치된 CCTV였다. 이 마을에서 3년째 살고 있는 주민은 "펜션 주인이 팔기 위해 내놓았는데 매매가 안 돼 종종 손님을 받았던 것으로 안다"며 "그런 일이 생겼는데 앞으로는 펜션 운영할 수나 있겠느냐"고 했다.
펜션이 있는 이 마을 주민들은 대부분 ‘그날의 일’을 입 밖으로 꺼내려고 하지 않았다. 모두 10여가구가 살지만 육지에서 온 사람들이 많아 서로 왕래가 많은 편은 아니었다. 사건이 발생한 펜션에 대해서는 구태여 말을 보태고 싶어 하지 않는 눈치였다. ‘고유정’이라는 말만 꺼내면 모두들 손사래를 쳤다.
이웃 주민들은 "경찰이 오가고, 사건이 뉴스에 나오기 전까지 아무것도 몰랐다"고 입을 모았다. 한 주민은 "비가 쏟아지는 날 집 안에서만 있는데 고유정이 언제 떠났는지를 어떻게 알겠느냐"며 "펜션 주인도 그렇고, 애꿎은 주민들만 속앓이하게 됐다"고 했다. 고씨가 전 남편 시신을 자신의 차에 싣고 떠난 지난달 27일 제주도 전역에 300㎜가 넘는 폭우가 내렸다.
◇"너무 끔찍해서 이웃들끼리 말도 안해"
고씨 사건이 발생한 펜션은 펜션들이 몰려있는 곳과 직선거리로 10km 이상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도 이 지역 펜션 업주들은 ‘펜션에서 범행이 발생했다’는 이야기가 괜스레 악재(惡材)가 될까 걱정하는 눈치였다. 한 펜션 주인(54)은 "안 그래도 불황이고, 중국인 관광객 발길도 점차 줄고 있는데, 좋은 일이 생겨도 모자랄 판에 이런 사건까지 발생해 난감할 뿐"이라고 말했다.
15일 제주시의 한 펜션촌. 펜션촌을 찾는 손님의 발길이 끊기면서 한산하다. /김우영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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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인 이날 오후 올레길 등을 찾는 여행객들도 붐벼야 할 펜션촌에 손님이라고는 구경하기 어려웠다. 주차장도 텅 비어 있었다. 인근 카페나 식당도 대부분 ‘자리를 비웁니다’라는 안내문을 붙여둔 채 주인이 자리를 비우고 있었다.
주차장 담벼락에 난 잡초를 뽑고 있던 한 펜션 주인은 "동네에 펜션이 우후죽순 생겨서 장사가 안된 지 오래됐다"며 "‘고유정 사건’ 때문에 사실상 눈앞이 캄캄하다"고 했다. 또 다른 펜션 직원은 "인터넷에서 ‘고유정 펜션’ ‘무인 펜션’ ‘제주도 펜션’ 등의 키워드가 유명해지면서 전화로 사건 현장과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등을 묻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고 했다.
고유정 수사를 맡은 제주동부경찰서는 지난 12일 고씨 사건을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도 ‘계획범죄’라고 했다. 검찰 역시 고씨가 피해자 강씨에게 졸피뎀 성분의 수면제를 어떻게 먹였는지 등을 분석하며 계획범죄 증거를 더 모으고 있다.
사건 현장을 지나던 한 주민은 "사건이 워낙 끔찍하고 무서워서 이웃들끼리도 고유정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다"면서 "빨리 시신도 찾고 처벌도 잘 이뤄져서 우리 마을이 일상으로 돌아가기를 바랄 뿐"이라고 했다
[제주=권오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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