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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 (토)

[기자메모]‘전범기업 현금화 유보’, 외교적 협의 첫 단추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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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정부는 강제징용 한·일 갈등에서 일본에 ‘보복 성격의 수출규제 등 압박을 철회하고 외교적 협의에 응하라’는 공식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런데 정부는 허공에 대고 외치듯 촉구만 하고 있을 뿐 이 같은 요구가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행동하지는 않는다.

일본이 예고한 조치를 강행하고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 자산을 매각해 현금화하면 한·일 갈등은 ‘루비콘강’을 건너게 된다. 정부는 연일 일전불사의 결연한 의지를 밝히고 있지만, 그 단계에 진입하면 어차피 정면충돌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는 일본도 마찬가지다. 현금화 여부는 이번 사태의 갈림길이다.

일본은 현금화가 이뤄지기도 전에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 조치를 발표하고 화이트리스트 제외를 예고했다. 현금화를 막아달라는 요구다. 현금화 절차가 중단된다면 일본이 예고한 조치를 강행할 명분이 약해지고 정부의 외교적 협의에 응할 공간이 생길 수 있다. 따라서 정부가 지금 시급히 해야 할 일은 “일본과 외교적 협의를 할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현금화를 일시 유보해달라”고 피해자들을 설득해보는 것이다.

그런데 정부는 사법부 결정에 정부가 개입할 수 없다는 이유로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 정부는 현금화를 중단시킬 권능이 없다. 하지만 피해자들의 동의를 얻는다면 사법 침해가 아니다. 정부는 ‘한·일 기업의 위자료 지급(1+1) 방안’을 일본에 제시한 상태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이 과정에서 판결과 무관한 한국 기업이 위자료 지급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 피해자들이 동의했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고 설명한 바 있다.

대법원 판결은 청구권협정에 대한 한·일 간 해석 불일치를 지적하고 있다. 정부가 불일치를 해소하기 위한 첫 단계로 일본과 원활한 외교적 협의를 할 수 있는 여건 조성이 필요하다고 피해자들을 설득하는 것은 오히려 판결 취지에 부합한다.

칼을 뽑아 사생결단을 내는 것은 언제든지 할 수 있다. 만약 피해자들이 거부하거나, 현금화가 중단됐는데도 일본이 협의를 거부한다면 싸워야 한다. 하지만 파국을 막기 위한 노력을 다해야만 싸울 수 있는 명분도 강해지고 국민적 지지도 받을 수 있다. 피해자들을 만나 외교적 해결을 시도할 수 있도록 현금화를 잠시만 유보해달라고 설득하는 것은 사법부의 권능을 침해하는 것도 아니고 일본에 굴복하는 것도 아니다. 국정을 책임진 정부가 응당 해야 할 책무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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