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석으로 석방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지난 8월 5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등 혐의에 대한 20차 오전 공판을 마치고 법원을 나서고 있다. /뉴시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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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장 발부 여부 결정 전에 유출…'위안부 판결 보고서'도 논란
[더팩트ㅣ장우성 기자] 증인의 목소리는 힘이 없었고, 흔들렸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인 14일, 사법행정권 남용 혐의로 기소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22회 공판이 열렸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5부(박남천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이날 공판에서는 공교롭게도 양승태 대법원 시절 법원행정처에서 작성한 '위안부 손해배상 판결 관련 보고서'가 도마에 올랐다.
이 보고서를 작성한 조인영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 심의관(대구지법 부장판사)이 증인석에 앉았다. 그는 지난 5월 법정에서 눈물을 보인 적이 있다. 역시 사법행정권 남용 혐의로 구속기소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공판에서 "(위안부) 피해자들이 제대로 된 사과와 배상을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면서다.
조 전 심의관의 뼈아픈 기억 역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지시에서 시작된다. 2015년 마지막 날이었다.
"위안부 손해배상 사건은 소멸시효, 주권면제, 통치행위론, 한일 위안부 합의 등 때문에 어려운 사건이지. 잘 검토해 보세요."
임 차장은 "2012년 강제징용 피해자 소송을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아닌 소부에서 판결한 것도 문제"라는 말도 꺼냈다. 당시 대법원은 원고인 강제징용 피해자 승소 취지로 고등법원에 사건을 되돌려보냈다. 위안부 소송을 주저앉히는 관점에서 보고서를 쓰라는 암시였다. 임 차장의 지시 바로 사흘 전인 2015년 12월 28일 박근혜 정부는 일본과 한일 위안부 문제 협상을 최종 타결한 상태였다. 문제의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이라는 문구가 들어간 그 합의다.
2013년 8월 위안부 할머니 12명은 일본 정부에 1인당 1억원을 요구하는 손해배상 청구 조정을 서울중앙지법에 신청했다. 한일 위안부 합의는 이를 좌절시켰다. 할머니들은 법원에 본안 소송을 내기로 했다. 임종헌 차장의 지시는 이때 떨어졌다. 사실상 소송에 개입하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었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무상이 한일 외교장관 회담을 열어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극적 타결한28일 2015년 12월28일 경기도 광주 퇴촌면 원당리에 위치한 나눔의 집에서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입장을 밝히고 있다./이새롬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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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차장의 속내를 느낀 조 전 심의관은 보고서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반인권적 범죄'라고 명시했지만 '전후 일괄보상 협상이 있을 경우 개인청구권은 소멸됐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결론냈다. 1965년 한일협정으로 일제강점기 피해자들의 개인청구권은 소멸됐다는 일본 정부의 입장과 같다. 보고서를 올린 지 이틀 뒤 임종헌 차장은 조 심의관에게 "수고했다"고 칭찬했다.
신문 내내 착잡한 기색을 감추지 못 하고 고뇌를 보였던 증인이었지만 검찰의 추궁은 매서웠다.
"오늘은 김학순 할머니가 일제 위안부 존재를 처음 알린 8월 14일로 국가기념일로 지정된 위안부 기림의 날입니다. 이렇게 역사적으로 평가된 사안인데 매춘이라는 표현을 쓸 수 있습니까."
검사의 지적은 위안부 보고서에 나오는 한 대목을 가리킨다. 이 보고서 '일본의 소장 부분 수령 거부시 사건 처리 방향'에는 '위안부 동원 행위가 주권적 행위인지 상사적(매춘) 행위인지...'라고 쓰여있다. 검찰은 조인영 전 심의관이 이 보고서를 쓰기 위해 참고한 논문과 법률 문헌을 모두 검토했다. '상사적 행위'라는 용어는 있지만 '매춘'이란 표현은 없었다. 검사와 증인의 문답이 이어졌다.
"임종헌 차장이 (매춘 표현을 쓰라고) 지시한 것입니까."
"구체적 지시는 없었습니다."
"매춘은 위안부 동원의 귀책사유를 인정하는 표현인데 현직 법관이 보고서에 쓰기는 부적절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까."
"마치 제가 피해자를 그렇게 생각했던 것처럼 말하는 것 같아 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할 지 모르겠습니다. 전체적 방향을 보지않고 문구만 보면 오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보고서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소송을 각하·기각할 경우 쏟아질 국민적 비판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판결문에 넣을 내용도 제안했다. '위안부 동원 행위는 일본 정부의 조직적, 공권적 행위이며 반인권적인 범죄에 해당한다는 점을 구체적 설시(판결문에 판결 이유를 설명하는 것)에 넣어 비판적 여론을 최대한 약화'라고 적혔다.
2017년 1월19일 서울구치소에서 법원의 결정을 기다리던 이재용 부회장이 구속영장이 기각되자 구치소를 나서고 있다. /임세준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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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공판에는 위안부 문제 외에도 '영장 청구서 사본 유출 사건'도 거론됐다. 2017년 1월17일 박상언 당시 기획조정 심의관은 조은영 심의관 등에게 제목에 '보안'이라고 붙은 이메일을 한 통 보낸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에 연루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김경숙 이화여대 교수에 대한 검찰의 구속영장 청구서 사본 스캔파일이 첨부됐다.
이메일이 발송된 때는 영장 발부 여부가 결정되기 전이었다. 박 전 심의관은 임종헌 차장의 지시로 영장 청구서를 미리 입수해 보고하고 소속 심의관들에게도 전달한 것이다. 상세한 수사 정보가 담긴 영장청구서는 영장 심사 판사에게 영향을 주지 않기 위해 영장 결정 이전 유출이 엄격히 금지된다.
검찰은 "양승태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가 이재용 부회장 구속 건을 사전에 의논하기 위해 받은 것 아니냐"고 추궁했으나 조 심의관은 "그렇게 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고 답변했다. 당시 이 부회장의 영장은 기각됐다가 박영수 특검의 재청구 끝에 한 달 뒤인 2월 13일 발부됐다. 2016년 11월 3일에는 최순실 씨의 영장 청구서 사본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 심의관 사이에 이메일로 공유됐다. 이 역시 발부 결정 전이었다.
검찰이 "영장 청구서 유출이 위법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느냐"고 묻자 조 심의관은 "중요사건 영장은 각 법원에서 보고를 받기도 해 위법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그러나 중요 사건 영장 보고의 근거가 되는 대법원 예규 '중요사건의 접수와 종국 보고'는 '영장 결정 후 보고한다'는 내용이다. 이조차도 재판 독립성을 침해할 우려가 제기돼 지난해 9월 폐지됐다.
leslie@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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