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태 장기화 가능성...누가 승리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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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도발
일본이 지난달 4일 한국을 겨냥해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 3대 소재 수출 제한 조치를 시작한 후 2일 각의를 열어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하기로 결정했다. 이어 7일에는 한국이 일방적으로 국제조약을 파기했다는 주장을 내세우며 화이트리스트 확정안이 담긴 정령(한국의 시행령)을 공포, 관보에 게재했다. 사실상 전면전이다.
한국은 초반 우왕좌왕하면서도 일본의 행동 직전까지 여파를 최소화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그러나 모든 시도는 무위로 끝났다.
당장 국회 방일단이 문전박대를 당하는 치욕을 겪었다. 지난달 31일 국회 방일단이 일본으로 날아가 막판 협상에 나서는 한편 니카이 도시히로 자유민주당 간사장과의 면담을 요청했으나 결국 거절당했기 때문이다. 기대를 모았던 강경화 외교부 장관과 고노 다로 일본 외무상의 담판도 무위로 돌아갔다.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 참석하기 위해 태국으로 간 강경화 외교장관은 방콕 그랜드 센타라 호텔에서에서 고노 다로 일본 외무상과 최근 벌어진 한일 경제전쟁을 두고 양자회담을 가졌으나, 신경전만 벌이고 끝났다.
결국 일본은 기어이 화이트리스트 카드를 빼들었고, 한국은 즉각 반격에 나섰다. 문재인 대통령은 일본 각의가 열리던 2일 즉각 임시 국무회의를 열어 강경한 반일 메시지를 내놨으며, 대표적인 지일파로 알려진 이낙연 국무총리도 "일본의 잇따른 조치는 한일 양국, 나아가 세계의 자유무역과 상호의존적 경제협력체제를 위협하고 한미일 안보공조체제에 균열을 낼 수 있는 처사"라고 비판했다. 이 총리는 14일 대전 유성구 한국기계연구원에서 열린 소재ㆍ부품ㆍ장비 경쟁력 강화를 위한 간담회에서 소재 및 부품과 관련된 특별법을 개정하겠다는 의지를 밝히기도 했다.
홍남기 경제부총리는 구체적인 로드맵을 내놨다. 그는 정부서울청사에서 주재한 일본 수출규제 대응 관계장관회의를 통해 “수출제한 3대 품목을 포함한 총 100개 전략 소재 품목을 지정해 집중적으로 투자, 5년 내 공급안정을 이루겠다”고 밝혔다. 또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도 정부서울청사에서 긴급 브리핑을 열고 “100대 품목의 조기 공급 안정성을 위해 특단의 대책을 마련하겠다”면서 “20대 품목은 1년 안에, 80대 품목은 5년내 공급을 안정화시키겠다”고 공언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등 경제 5단체도 일본의 제재 확대를 비판했다. 이들은 "일본 정부가 한국을 전략품목 수출 우대 국가인 이른바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기로 결정한 데 대해 깊은 아쉬움을 표한다"면서 "일본 정부가 추가 수출규제를 결정 한 것에 대해 한국 경제계는 양국 간의 협력적 경제관계가 심각하게 훼손 될 수 있음을 우려한다"면서 "일본 정부는 이제까지의 갈등을 넘어서 대화에 적극 나서주기를 촉구한다. 우리 경제계도 경제적 실용주의에 입각해 양국 경제의 협력과 발전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한일 경제전쟁이 정점에 이르며 일본제품 불매운동도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다. 특히 일본에 실질적인 타격을 줄 수 있는 일본여행 불매운동이 타깃이다. 현대경제연구원은 13일 ‘한ㆍ일 여행절벽의 경제적 피해와 시사점’ 보고서를 통해 국내에서 일본여행 불매운동이 광범위하게 벌어질 경우 내년 일본 경제성장률은 0.1%P 하락할 것으로 전망했다. 일자리는 10만개 이상이 사라진다.
결국 아베 총리도 나섰다. 교도통신에 따르면 아베 총리는 지난 13일 오봉 명절을 맞아 지역구인 중의원 야마구치현 제4선거구에 방문해 “민민간의 일은 민민 간에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과 일본의 경제전쟁은 정부와 정부의 일이며, 민간에서는 필요이상 확전할 필요가 없다는 취지로 해석된다.
그러나 한일 경제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지며 두 나라의 냉기류는 더욱 강해지고 있다. 당장 최소한의 소통창구도 막히는 분위기다. 15일 업계에 따르면 조세영 외교부 1차관은 광복절 직후인 16일이나 17일 아키바 다케오 일본 외무성 사무차관과 전격적으로 회담을 갖기로 했으나 최근 전격 취소됐다. 한일 경제전쟁이 숨 가쁘게 돌아가는 상황에서 두 나라가 최소한의 소통에 나서려고 했으나, 이러한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자 모두 부담을 느꼈다는 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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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태는 어떻게 흘러갈까
일본은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하기로 결정하면서도 세부적인 가이드라인을 확정하지 않았다. 여기에 지난달 4일 수출 규제를 걸었던 품목 중 하나를 수출 허가품으로 돌리는 영악함을 보여줬다. 일각에서는 한일 경제전쟁의 전격적인 화해 가능성으로 보지만, 일본이 경제보복의 당위성을 확보하려고 얕은 수를 쓰고 있다는 것이 중론이다. 이에 한국 정부도 일본을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하면서도 ‘대화가 우선’이라는 전략으로 맞서는 상황이다.
이번 사태를 유연하게 넘기려면 정부와 국민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결국 기업이 활로를 찾아야 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승기는 잡았다. 삼성전자의 경우 이재용 부회장이 일본 경제보복 직후 현지로 날아가 소재 및 부품 수급 상황을 점검하는 한편, 최근에는 ‘탈일본’에도 일부 성공했기 때문이다.
15일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일본업체의 해외합작 생산법인 등을 통해 반도체 핵심 소재를 수급받고 있다. 벨기에 소재 업체 등에서 최대 10개월 물량의 포토레지스트를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포토레지스트는 지난달 4일 일본이 경제보복에 나서며 수출제한에 돌입한 3대 소재 중 하나다. 일본 반도체 소재업체 JSR이 벨기에 연구센터 IMEC과 합작해 만든 업체로 추정된다.
삼성전자가 일본 도쿄오카공업(TOK)과 인천 송도 생산공장 증산을 논의하고 있다는 말도 나온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9일 일본 기업인 모리타(森田)화학공업이 올해 말부터 중국 공장에서 고순도불화수소 생산에 나선다고 보도하며 "삼성전자 중국공장 등에 납품할 것"이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삼성전자는 탈일본 부품 전략을 구사하는 한편 일본에서 예정된 파운드리 포럼도 예정대로 진행해 ‘자기만의 길’을 가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여기에 초기술 격차를 바탕으로 다양한 가능성을 타진한다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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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우려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재용 부회장은 현재 컨틴전시 플랜을 본격 가동하며 "긴장은 하지만 두려워하지 말자”면서 “지금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기회를 창출하자”는 메시지도 내놨다. 이어 현장경영에 나서며 사태 추이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고동진 삼성전자 사장도 8일 갤럭시노트10 공개 기념 간담회에서 일본의 제재와 관련해 "하반기 스마트폰 출시와는 관련이 없다"면서도 "인쇄회로기판(PCB) 등 제4 하도급까지 있는 스마트폰 원재료에 영향이 없을 수 없다. 3, 4개월 제재가 이어지면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업계에서는 일본이 당분간 강공모드를 유지하면서도, 일정부분 퇴로 찾기에 나설 것이라는 주장에 무게를 둔다.
당장 일본 경제상황이 어렵다. 지난 8일 일본 재무성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일본 경상수지 흑자액은 지난해 동기 대비 4.2% 줄어든 10조4676억엔을 기록했다. 무역수지 흑자액의 경우 전년 동기보다 무려 87.4% 급감한 2242억엔으로 쪼그라들었으며 수출 감소가 무역수지 흑자 급감의 주요 요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한일 경제전쟁의 여파로 무역수지 흑자액이 줄어들었다고 보기는 시기적으로 어렵지만, 미중 경제전쟁이 전개되는 상황에서 일본의 경제 기초체력이 약해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결국 한일 경제전쟁을 제대로 끌고갈 수 없다는 평가다.
일본 내부에서도 한일 경제전쟁의 파급력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실수하고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서울 특파원 출신인 마키노 요시히로(牧野愛博) 아사히신문 편집위원은 월간지 문예춘추 기고를 통해 “아베 총리의 결단에 문재인 대통령이 소생했다”면서 최근 일본 정부의 조치가 의도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음을 걱정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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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일본은 여전히 28일부터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하기로 결정한 방침을 철회하지 않고 있으며, 최근 일부 수출 규제를 풀어준 것도 결국 경제보복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포석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아직 미국이 적극적인 중재의지를 보이지 않는 것도 눈길을 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10일 미 뉴저지주 소재 자신의 골프클럽으로 휴가를 떠나기 전 기자들과 만나 “한국과 일본이 잘 지내지 못해 걱정”이라는 원론적인 입장만 보였으며 14일에는 펜실베이니아주 모니카에 있는 셸 석유화학단지를 방문한 자리에서 일본이 미국을 상대로 막대한 무역흑자를 기록하고 있고, 한국의 안보무임승차를 비판하기도 했다. 한국과 일본 두 나라를 싸잡아 비판한 셈이다.
최진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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