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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7 (일)

중기 “일 수출규제 20년만의 기회…대기업 바뀌면 일본 추월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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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독립, 상생 협력이 답이다]

② 소재·부품업체들 ‘기대 반 걱정 반’

반도체 소재 등 일부 중소기업들

일 수출규제 뒤 대기업 판로 뚫려

“대기업 공장서 테스트 기회 줘야”

“전속거래 계속 땐 기술개발 한계”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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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리 반도체용 감광액을 만드는 ㄱ업체는 최근 반도체 대기업들로부터 ‘러브콜’을 받았다. 일본의 수출규제 충격으로 반도체 핵심 소재 수급이 막힐 위기에 놓이자 대기업들이 ‘추가 물량을 확보하고 싶다’며 연락을 취한 것이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통과의례였던 경쟁사와의 거래실적도 요구하지 않았다. ㄱ업체 관계자는 “일본산 쓴다며 거들떠보지도 않던 대기업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오다니 놀라웠다”며 “구체적인 물량 변화까지 밝힐 순 없으나 주문 문의가 계속 들어오는 건 사실”이라고 했다.

디스플레이용 소재를 납품하는 ㄴ업체도 그간 막혀 있던 대기업 판로가 순식간에 뚫리며 쾌재를 불렀다. 기존엔 일본산이 80% 이상을 차지해 제품 검토조차 부탁하기 어려웠다. ㄴ업체 관계자는 “일본 수출규제 국면이 풀리고 나면 ‘팽’당할까 두렵다”면서도 “20년 만에 올까 말까 한 기회”라고 말했다.

한겨레

“일본 추월 가능하다” 중소기업의 자신감

<한겨레>가 접촉한 일부 소재·부품·장비 기업들은 ‘소재·부품·장비 국산화’에 기대감을 감추지 않았다. 아직 일부 사례에 불과하지만 중소기업 소재·부품 매입에 소극적이던 대기업들이 일본 수출규제를 계기로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어서다.

반도체 업계에서 20여년을 근무한 기술자 ㄷ씨는 “중소기업에도 테스트를 비롯한 여러 기회가 주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반도체 공정은 나노(10억분의 1) 단위로 이뤄지는 미세한 공정이기 때문에, 고객사가 될 수도 있는 대기업 양산라인에서 직접 소재·부품을 검증해보지 않으면 제대로 개발을 한 게 맞는지 가늠하기조차도 어렵다고 한다. 일부 연구소나 대학에 기술 시연을 해볼 수 있는 테스트베드(시험장)가 갖춰져 있긴 하지만 대기업 생산라인만큼 미세하지 않다는 문제가 있다. ㄷ씨는 “중소기업이 자체적으로 테스트해볼 반도체 라인을 만들려면 몇조원이 들어간다. 그럴 수도 없거니와, 몇백억 매출 올려보겠다고 몇조원짜리 라인을 세울 수도 없지 않나. 결국 대기업 생산라인에서 테스트해보는 방법밖에 없었다”며 “그동안 중소업체는 눈을 감고 개발하는 것과 다름없었는데, 이제 대기업도 국산화 필요성을 알게 됐으니 중소기업에도 여러 기회가 주어질 거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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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산 반도체·디스플레이 장비 국산화를 진행 중인 업체 관계자 ㄹ씨는 더 나아가 “대기업이 변하면 일본 추월도 가능하다”며 자신감을 나타냈다. 반도체·디스플레이 공정에 쓰이는 자동화 로봇 개발에 성공한 ㄹ씨는 “그동안 국내 대기업이 경험 많고 노련한 일본 회사와 거래하면서 중소기업에는 기회를 주는 데 소극적이었다. 하지만 중소업체도 거래 경험을 해봐야 기술력을 올릴 수 있고, 그렇게 된다면 어느 순간 일본을 추월할 수 있을 거라 본다”며 “장기적으로는 국산 소재·장비의 비중이 늘어날 거라 보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ㄷ씨도 “그동안 삼성전자·에스케이(SK)하이닉스 같은 대기업과 거래한 일본 소재·부품회사는 이들 회사의 피드백을 꾸준히 받으면서 기술력이 높아져 성장했다. 또 글로벌 시장에서는 ‘삼성전자·에스케이하이닉스에 납품하는 회사’라는 사실만으로도 신뢰를 받기 때문에, 이들 기업과 거래한 일본 회사들의 국제 시장 점유율이 자동으로 올라간 측면도 있었다”며 “일본 소재·부품회사들이 삼성전자·에스케이하이닉스를 바탕으로 성장한 만큼, 대기업도 이번 사태에 책임감을 가지고 중소기업에도 장벽을 열어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다른 회사랑 거래하지 마’ 전속거래 관행 어떻게

모든 중소기업이 탈일본 국산화 흐름을 기회라고 보는 것은 아니다. 정부가 지난 5일 발표한 대외의존형 산업구조 탈피를 위한 ‘소재·부품·장비 경쟁력 강화대책’에 고개를 갸우뚱하는 중소기업들도 있었다. 법과 제도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 대표적으로 ‘전속거래 관행’을 해결할 수 있겠냐는 의구심이다.

20년 넘게 반도체·디스플레이 장비 제조 중소기업을 운영 중인 ㅁ씨는 “소재·부품·장비 국산화 대책이 중소기업에 기회가 되지 않겠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중소기업에 얼마나 대기업의 문이 열릴지 미지수”라고 말했다. ㅁ씨의 회사는 ‘일부’ 대기업과 전속거래를 맺고 있다. 전속거래란 하청업체가 특정 원청사업자와만 거래하도록 구속하는 행위를 말한다. 중소기업이 대기업에 중장기 공급체계를 구축해 안정적인 성장을 꾀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한편으론 중소기업의 추가 거래 기회를 저해한다는 비판도 끊이지 않았다.

정부가 이번에 내놓은 소재·부품·장비 경쟁력 강화대책에는 전속거래 관행의 부작용을 해소할 수 있는 방안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ㅁ씨는 “대기업과 대기업 사이엔 절대 넘을 수 없는 높은 벽이 있다. ‘저 회사랑 거래하면 우리 회사랑은 못 한다’ 같은 관행이 (이번 조치로) 해결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전속거래 대기업이 중소기업에 ‘우리에게 이런 수요가 있으니까 만들어 봐라, 여건이 되면 사주겠다’ 정도로 요구하는 경우가 있는데, 중소기업 입장에선 개발 뒤 대기업이 안 사줘도 할 말이 없고 비용만 떠안는 셈이다. 하지만 만약 다른 대기업에도 개발한 걸 팔 수 있게 된다면, 중소기업 입장에선 기회가 몇 배로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디스플레이 분야의 한 부품기업 대표 ㅂ씨도 “세금 깎아주고 정부 사업에서 우대해주는 정도로 깨질 거래 관행이었다면 진작 깨졌을 것”이라며 “우리 중 하나가 (일본이 지난 4일부터 수출규제를 강화한 소재) 3개 중 1개를 개발해낸다고 대박이 날까? 어느 대기업 테스트를 통과하는 순간 다른 잠재적 거래처들과는 ‘바이바이’하는 거고, 하나 있는 거래 안 끊기려고 단가 깎고 또 깎게 될 거다. 한국 땅에서 이건 안 바뀌는 것”이라고 말했다.

중기 40% “전속거래가 고객 다변화 막는다”

김학수 호서대 기술경영전문대학원 교수가 지난 4~5월 반도체 분야 25개 중소·중견기업을 조사한 결과를 보면, 응답 기업의 40%가 ‘고객사가 독점 거래를 요구해 고객 다변화가 어렵다’고 응답했다. ‘국내 시장의 한계 또는 해외 시장에서의 기회를 이유로 수출을 희망하고 있으나 고객사의 요청으로 사실상 어렵다’고 답한 기업도 44%였다.

전문가들은 대기업들의 변화 의지가 없다면 최근 정부가 내놓은 대책이 외려 중소기업 경쟁력을 약화하는 역설을 부를 수 있다고 지적한다. 박재근 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는 “대기업도 머리론 아는데 실제로는 시도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며 “스스로 자정 노력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어느 분야 중소기업들을, 어느 규모만큼 키울지 정부에 구체적인 목표를 제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신다은 신민정 기자 dow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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