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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7 (월)

[김지석의 화.들.짝] 미국 우선주의, 과거·현재와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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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1987년 9월, 40대 초반의 부동산업자이던 도널드 트럼프는 많은 돈을 들여 <뉴욕 타임스> <워싱턴 포스트> <보스턴 글로브>에 ‘공개서한’ 형태의 전면 광고를 낸다.

“강한 기개 없이는 미국의 해외 방위 정책을 바로잡을 수 없다”는 제목이다. 그는 “스스로 지킬 만한 능력이 충분한 나라들의 방어에 우리 돈을 쓰는 일을 멈춰야 한다”며 일본·사우디아라비아 등의 방위비(미군 주둔비) 분담을 주장한다. 그는 이후 기자회견에서도 동맹국에 일종의 세금을 부과해 미국 재정적자를 해결하고, 대일본 무역 불균형 문제에서 더 강경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트럼프의 진실>)

지금 트럼프 정부의 미국 우선주의와 동일한 내용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집권 공화당 안에서도 거의 호응을 얻지 못한다. 공화당 주류파는 이 광고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에 대한 공격이라며 비난한다. 트럼프는 상업적이고 선동적인 인물로 의심받는다.

이렇게 주변부에 머물렀던 사고가 어떻게 미국 대외정책의 주류가 됐으며,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

■ 미국 우선주의는 자국 이익을 앞세우는 민족주의의 한 유형이다. 지구촌에서 미국 위상을 특별하게 설정하는 점에서, 미국 예외주의 및 일방주의와 뿌리를 공유한다.

미국 우선주의는 두차례 세계대전이 있었던 20세기 전반기에는 비개입주의(흔히 고립주의라고 한다)로 표출됐으나, 2차대전 참전과 승리로 확실한 패권국이 된 뒤로는 사정이 달라진다. 지구촌 중요 사안에 관여하되 어떤 방식으로 하느냐에 따라, 국제협력과 자유민주 이념을 중시하는 국제주의와 권력 정치에 충실한 현실주의가 큰 흐름을 이루고 비개입주의는 발언권이 크게 줄어든다. 미국의 패권이 관철되는 상황에서는 설령 미국 우선주의를 실행하더라도 이전의 비개입주의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

레이건 집권기(1981~88년)는 이후 한 세대 동안 관철될 미국 대내외 정책의 뿌리가 형성된 시기다. 레이건은 경제와 외교, 사회문화 영역에서 모두 성과를 낸 대통령으로 평가된다. 그는 신자유주의를 밀어붙여 1970년대의 스태그플레이션을 극복하고 세계 경제에 대한 미국의 지배력을 강화한다. 힘의 우위에 기초한 현실주의 대외정책으로 냉전 종식을 앞당기고 소련과의 핵무기 제한 합의를 끌어낸 것도 그의 공적이다. 기독교 보수파는 그의 집권기 동안 중요한 사회·정치 세력으로 성장한다.

그는 모든 보수세력을 통합했다는 의미에서 ‘레이건 동맹’을 만든 주역으로 꼽힌다. 신자유주의, 현실주의, 기독교 우파 세력이 핵심이다. 트럼프와 같은 미국 우선주의자와 네오콘은 곁다리다.

■ 뒤이은 조지 부시 정부(1989~1992년)의 성격도 비슷하다. 단, 그의 집권기에 일어난 1차 걸프전과 소련 붕괴 등은 네오콘 세력이 힘을 키우는 계기가 된다.

신자유주의는 민주당 출신의 빌 클린턴 대통령 집권기(1993~2000년)에 더 번창한다. 세계무역기구(WTO)가 설립되고 금융규제가 풀리며 국경을 넘는 자본의 활동이 활발해진다. 대외정책에서는 국제주의가 주를 이루면서, 국제기구와 비정부기구(NGO)의 활동이 크게 늘어난다. 클린턴 정부는 사회문화 영역에서 진보적 자유주의를 추구하지만, 이에 대한 반발로 기독교 우파의 활동이 더 활발해진 것은 역설적이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하원 다수당이 수십년 만에 공화당으로 넘어간다. 신자유주의 전성기인 이 시기에 미국 우선주의가 설 자리는 없다. 커지는 빈부 격차와 노동조건 악화 등에 항의하는 반세계화 운동이 거세지지만, 민족주의보다는 약탈적인 자본에 맞서 다양한 민중 세력이 연대하는 성격이 강했다.

■ 신자유주의는 아들 조지 부시 대통령 집권기(2001~2008년)에도 이어져 2008년 미국발 세계 경제위기를 낳는다. 대외정책에서는 네오콘 세력과 일방주의가 득세하고, 기독교 우파는 보수정권을 뒷받침하는 분명한 축의 하나가 된다. 이 시기 네오콘은 자유주의·세계주의와 일정 부분 결합한 면에서 미국 우선주의와 거리가 있다. 이라크 침공을 주도한 세력이 ‘민주주의 확산’을 명분의 하나로 내세운 것이 그런 사례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 정부(2009~2016년)가 신자유주의에 대한 확실한 개혁을 추구하고 대외 개입을 줄였다면 이후 미국 우선주의가 득세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오바마는 경제위기의 주범이었던 금융자본을 규제하는 데 실패한다. 그가 의욕적으로 추구한 건강보험 개혁도 악화한 양극화 추세를 바꿔 삶의 질을 개선하는 데까지는 가지 못한다. 오바마 정부의 국제주의도 부시 정부의 일방주의로 무너진 국제 체제에 새 힘을 불어넣기에는 미흡했다. 그의 대외정책은 어설픈 타협을 추구하거나 불필요한 개입을 계속한다는 이유로 보수·진보 양쪽으로부터 비판받는다. 거기에다 경제위기로 큰 타격을 받은 중산층과 저소득층의 불만이 누적된다. 이런 맥락 속에서 미국 우선주의는 새 기회를 맞고, 이는 트럼프의 극적인 대통령 당선으로 나타난다.

■ 트럼프 정부는 미국 우선주의와 네오콘, 기독교 우파 세력을 토대로 한다. 한 세대 전 레이건 집권기와 비교해보면, 신자유주의와 현실주의에 대해 보조적 위치에 있던 미국 우선주의와 네오콘이 주된 자리로 올라섰음을 알 수 있다. 사회정치 세력으로서 기독교 우파는 꾸준히 영향력을 유지한다.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는 모든 국내외 정책에 적용된다. 국내에서는 이주민을 비롯해 소수파에 대한 공격이 핵심이다. 나라의 정체성을 백인에서 찾기 때문이다. 흔히 미국을 이민자의 나라라고 하지만, 미국 우선주의자를 비롯한 완고한 보수세력에게 백인은 신대륙을 개척하고 나라를 만들어 주도하는 특수한 지위를 갖는다. 대외관계에서 미국 우선주의는 잠재적 적국이나 경쟁국뿐만 아니라 동맹국과 우방국에도 적용된다. 상대가 누구든 압박을 가해 이익을 끌어낸다. 공격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시한도 없다. 상대가 한번 양보하면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양상마저 보인다.

■ 트럼프 정부의 행태는 미국 바깥뿐만 아니라 안에서도 비판받는다. 하지만 민족주의는 미국 정치권에서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 미국 우선주의가 정착돼가는 양상이다. 트럼프가 사라지더라도 미국 우선주의는 상당 부분 유지될 것이다.

가장 분명한 분야가 중국 정책이다. 트럼프가 벌이는 대중국 관세·기술·통화 전쟁은 달러패권의 앞날을 가늠할 시금석이다. 트럼프를 경원한 전통적인 공화당 주류파뿐만 아니라 민주당의 다수도 중국에 대해 강한 경계심을 나타낸다. 어느 정권이든 적어도 앞으로 10년 동안은 대중국 공세를 이어갈 거라는 전망이 유력하다. 중국의 강한 반발을 고려하면, 미국의 모든 대외정책이 대중국 관계를 중심으로 움직일 수 있다.

이제 미국 우선주의를 배제한 지구촌 국제관계는 생각하기 어렵다. 지난 2~3년 동안 일어난 정세 변화의 많은 부분이 이와 연관된다. 미국 우선주의를 상수로 두면, 지구촌 전역에서 민족주의가 강해지고 갈등이 더 커질 것이 분명하다. 세계주의 성격의 신자유주의가 대규모 경제위기를 불러온 것과는 다른 차원에서 새 위기가 다가오고 있다.

한겨레

김지석
대기자


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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