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주민 수천명이 조사 대상
당시 용의자 혈액형 B형 특정해 O형인 李는 용의선상 제외된 듯
경찰, 7차 사건 용의자 목격한 버스 안내양 소재 파악 나서
경기남부경찰청 관계자는 이날 "사건 당시에 경찰이 이춘재를 조사한 기록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화성군 태안읍 진안리 토박이인 이춘재는 30세이던 1993년 충북 청주로 옮길 때까지 화성에서 살았다. 9차 사건(1990년 11월) 당시 화성경찰서 형사계장이었던 남상국씨는 본지 통화에서 "태안읍 일대에 형사 130여명이 배치돼 진안리는 손길을 거치지 않은 집이 없었다"며 "이춘재도 수사 보고 대상에 당연히 포함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남씨를 비롯해 본지가 접촉한 당시 수사 관계자 6명은 모두 이춘재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다. 하승균 당시 수원경찰서 형사계장은 "진안리 담당 팀의 보고서에는 있었는지 모르나 주요 용의자로 올라왔던 기억은 없다"며 "담당 경찰관이 실적 보고를 위해 이름을 기재한 정도가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8~10차 사건 수사에 참여한 심동수 용인동부경찰서 수사과장도 "수천 명이 용의 선상에 올랐기 때문에 이름이 포함됐을 수 있지만, 사건마다 정리된 주요 용의자에는 없었다"고 말했다.
이춘재가 용의 선상에서 빠져나간 것은 경찰의 오판 탓이라는 분석이다. 특히 혈액형이 문제였다. 당시 경찰은 용의자의 혈액형을 B형으로 봤다. 이춘재의 혈액형은 O형이다. 당시 수사에 따르면 2차(1986년 10월), 4차(1986년 12월), 5차(1987년 1월)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체모·체액 등에서 B형 혈액형이 나왔다. 특히 9차와 10차 사건(1991년 4월)에서도 B형이 나오면서 확신이 굳어졌다. 이 때문에 다른 혈액형은 용의자에서 배제됐다는 것이 남씨 등 현장 수사 관계자들의 증언이다. 당시 경찰의 집중 탐문과 조사를 받았던 진안리 주민들도 비슷한 내용을 증언했다. 한 주민은 "당시 B형이라는 이유로 형사가 가만히 있으라고 하고 머리카락 세 가닥을 뽑아갔다"며 "젊거나 40세를 넘겨 미혼이라는 등의 갖가지 이유 때문에 대부분의 남자가 머리카락을 뽑혔고 조사를 받으면서 가혹 행위를 당한 사람도 있었다"고 말했다.
경찰은 기존 사건 기록을 검토하고, 대면 조사에서 이춘재가 한 진술 등을 분석하고 있다. 수사 기록은 15만장에 이른다. 책으로 치면 280권 분량이다. 경찰은 또 7차 사건(1988년 9월) 용의자를 목격했던 시외버스 안내양(당시 22세)의 소재 확인에도 나섰다. 경찰은 당시 안내양과 버스 기사의 증언 등을 근거로 '신장 165~170㎝, 오똑한 코에 날카로운 눈매의 24~27세 남자'의 몽타주를 그려 전국에 수배했다. 경찰은 최근 면담한 이춘재가 몽타주와 얼굴이 비슷한 것을 확인했으나 특징 가운데 하나로 제시된 손목 문신은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수원=권상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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