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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3 (토)

이슈 종교계 이모저모

“템플스테이, 사찰 음식도 요즘 너무 호화스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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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 논설위원의 직격인터뷰환경·생명운동가 법일 스님

전남 화순 오지의 암자에서 ‘지역 환경운동’

지난해 봄 법장 스님이 홀로 열반한 시적암

“젊은 시절 어깨 힘 들어간 거 많이 반성했다”

“사찰은 청빈·검소한 삶 실천하는 곳 돼야”

탐욕·소비 벗어나려 모든 물품 탁발해 사용

‘농촌 폐비닐 수거’ 등 신자와 함께 실천 나서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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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전후 수경 스님이 선봉에 선 불교환경연대는 오체투지를 비롯한 자기 성찰적 환경운동으로 시대를 깨웠다. 그러나 2010년 수경 스님이 잠적한 이후 불교환경운동은 다시 대중의 시야에서 멀어졌다. 2016년부터 설악산 케이블카 설치, 탈핵, 가리왕산 스키장, 흑산도 공항, 사드 등 환경 이슈가 있는 곳마다 다시 승복이 전면에 등장했다. 그 선봉엔 불교환경연대 전 대표 법일(63) 스님이 있었다. 그는 불교환경연대 대표를 맡아 서울에 와서도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를 타지 않고 철저히 계단을 올라다녔던 수행자적 운동가였다.

그가 서울살이를 끝내고 지난해 5월 전남 화순 남면 내리 모후산 산골 암자로 들어갔다. 절집 도반인 법장 스님이 20년간 홀로 살다가 아무도 없는 가운데 열반해 지난해 3월 법구가 발견된 시적암이었다. 도반처럼 은둔한 줄 알았던 그는 이 오지에서 암자식 환경운동을 시작했다. 그가 있는 곳은 서울이든 오지 암자든 환경·생명운동의 최전선이 된다. 지난 24일 ‘고요한 이곳’이란 의미의 시적암으로 법일 스님을 찾아갔다.

―시적암에서 은거하다 지난해 열반한 법장 스님과는 어떤 인연인가.

“세 살 연상인 그는 나보다 늦게 지선 스님에게 출가한 사제다. 전남 영광 불갑사에서 지선 스님을 모시고 함께 살았다. 해인사 도서관장을 하다가 이 산골에 들어와 땅 4천 평에 시적암을 짓고 농사를 지었다. 내가 전남 완도 신흥사에 주지로 있을 때는 그를 불교대학 강사로 초청해, 2년 동안 오가며 강의도 해줬다. 문학도 출신이어서 책을 좋아하고 글을 곧잘 썼다. 댓명뿐인 신자들이 주말에 오면 800평 밭에 농사를 함께 지어 나눠 먹으며 거의 생활공동체처럼 살았다. 5년 전까지 전기도 안 들어오고, 휴대전화가 터진 것도 2개월 전이다. 그러니 홀로 열반할 당시,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이었더라도 119구급차를 부를 수 없었을 것이다. 고집스럽게 ‘욕심을 줄여 만족하는’ 소욕지족의 삶을 산 분이다. 형제 중에 기독교인이 있었음에도 유족이 법장 스님의 유지를 받들어 이 암자를 백양사에 기증해주었기에 내가 들어올 수 있었다.”

―스님도 법장 스님과 같은 삶을 살 텐가.

“법장 스님은 세속에 물들지 않고 올곧게 살았다. 부처님오신날 등값조차 받지 않았다. 그 뜻을 이어받아 시적암에서는 5천원을 내든 100만원을 내든 등값과 기도비에 상관없이 평등한 등을 켤 생각이다. 돈이면 다 된다는 자본주의에 살지만 말이다. 먹여 살릴 대중이 많은 대찰에선 어렵겠지만, 혼자 사는 암자에선 이런 실험이 가능하다. 점심때는 고구마나 가래떡 한두 개를 먹고, 저녁은 거르니 특별히 많은 것이 필요 없고, 작은 것만으로 행복하다. 신자들에게 암자에서 필요한 물품을 새로 사오면 받지 않겠다고 공지한 것도 우리나마 탐욕의 소비 대열에서 벗어나보기 위해서다. 요즘은 물질이 넘쳐나는 시대다. 쓰지 않고 남아도는 것이 많다. 그러니 사지 않고 얻어 쓰기로 했다. 탁자와 그릇은 물론 작업복과 신발도 그렇게 탁발해 쓴다.”

―무소유의 탁발 정신인가.

“그렇다. 이는 거지 근성과는 반대다. 탐욕을 내려놓자는 것이 불교다. 내가 가진 것에 만족하지 않고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고, 배우자까지 남의 배우자와 비교하고, 자식까지 남의 자식과 비교하며 갈구를 그치지 않고 욕망하는 것이야말로 거지 습성이다. 자기를 하찮게 생각하니, 남과 비교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당신이 바로 부처님’이라고 했다. 이처럼 고귀한 자신과 배우자와 자식의 고귀한 가치를 안다면 남과 비교하며 거지처럼 구는 짓을 할 수가 없다. ‘힘들다’ ‘고통스럽다’는 이들도 살펴보면 먹고살 만한 경우가 많다. 그런데도 고통스러운 것은 욕심 때문이다. 더 높이 오르고, 더 많이 가지고, 더 멀리 가려고 하기 때문이다. 조금 불편해도 괜찮다, 검소하고 단순하게 사는 게 좋다고 생각하면 그 순간 평화로워진다.”

―요즘 사람들은 편리를 선호해 절집들도 편리하게 변하고 있지 않은가.

“절이 세속을 따라가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절에 와서도 텔레비전을 보고 휴대전화를 하고 매일 샤워하기보다는 밤에 해우소에 가다가 별도 보고 숲길도 걸으며 흙도 만지고 풀도 뽑고 하루쯤은 샤워 안 하고 느리고 불편한 삶을 경험하면서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 생각도 해보고, 자기를 변화시키고 세상을 사는 에너지를 얻는 것이 좋지 않을까. 템플스테이다, 사찰 음식이다 하면서 왕들이나 먹었을 호화로운 음식을 펼쳐놓는 것이 과연 불교다운 것인가. 물질과 소비로 어떻게 세속을 앞설 수 있나. 사찰은 청빈하고 검소한 삶을 통해 정신적인 안식을 얻도록 하는 곳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법장 스님이 은둔형이었다면, 스님은 마을 사람들 속으로 내려간다고 들었다.

“사찰은 지역민들과 고락을 함께해야 한다는 게 평소 생각이어서 오자마자 백중날 식사를 4개 마을 경로당에서 대접했더니 어르신들이 좋아하셨다. 새벽 4시에 일어나 몸풀기 운동을 하고, 5시30분에 예불을 드리고, 6시30분에 아침 공양을 하고 설거지를 하고, 7시30분에 아이들(개 두 마리)과 포행(천천히 걸으며 참선하는 것)을 간다. 포행은 일부러 마을 쪽으로 간다. 2시간 동안 걸으며 만나는 마을 사람들과 인사를 하다보니, 이제 ‘경로당에 놀러오라’고 한다.”

―환경운동이라면 산골보다는 사람이 많은 도시가 효과적이지 않은가.

“그렇지만도 않다. 오히려 도시는 쓰레기 분리수거가 정착돼 있는데 시골은 그렇지 못하다. 요즘은 대부분 비닐을 깔고 모종을 한다. 그렇게 사용한 폐비닐을 아무 데나 버린다. 농부들이 대부분 노인이어서 수거할 힘도 없다. 10여명과 하천으로 폐비닐 수거에 나섰는데, 불과 50m 만에 자루 10개가 가득 찼다. 비 온 뒤 하천에 가면 도저히 봐줄 수가 없다. 신자 한 분이 날마다 폐비닐을 수거하고 다니는데, 아무리 치워도 끝이 없다고 하소연한다. 가끔 폐비닐을 모아 불태워버리는 노인들도 있다. 발암물질인 다이옥신이 나오기에 해서는 안 되는데, 이런 심각성도 인식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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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환경을 어떻게 개선할 수 있는가.

“이것을 ‘우리’ 문제로 보면 안 된다. ‘내 문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른 사람을 칼로 찌르면 ‘이건 살인죄다’ ‘상해죄다’ 하면서, 비닐이나 빨대나 일회용품 버리는 것은 범죄인 줄 모른다. 이렇게 버린 것들이 쌓여 남태평양에 한반도 수십 배 크기 쓰레기섬이 생겼다. 그러니 해산물은 청정하다는 것도 옛말이다. 비닐은 잘게 쪼개질 뿐 없어지지 않아 물고기와 해조류 속으로 들어간다. 그래서 우리도 모르는 가운데 눈에 띄지 않는 비닐 조각을 먹고 있다. 심각하다. 병원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수많은 병이 생기는 것도 이런 오염과 무관하다고 볼 수 없다. 어떤 것도 별개로 존재하는 것은 없고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내가 버린 것이 타인을 죽이고, 결국 나도 해친다. 그러니 ‘내가 망쳤다’ ‘내가 문제다’ 라고 인식해 나부터 쓰지 않고 버리지 않아야 한다. 시적암에선 가꾼 채소를 신자들에게 가져가게 하는데, 비닐봉지엔 담아갈 수 없다. 그래서 에코백 400개를 나눠줬다. 마을 분들과 좀 더 친해지면 경로당에 가서 환경 영상도 틀어주면서 자연스럽게 환경교육을 할 생각이다.”

―불교환경연대 대표 때 방생 대신 버드나무 심기를 권유했다. 그 이유는?

“통상 절에서 정월(음력 1월) 초에 강에 방생을 하는데, 너무 추워서 놓아준 물고기들이 얼어 죽기 쉽다. 그러면 오히려 강을 오염시킨다. 대신 보통 나무들보다 수십 배나 정화 능력이 있는 버드나무를 심으면 강이 살아난다. 경기 여주 신륵사에 머물 때 묘목장을 만들어 버드나무를 나눠주었다. 도시인들은 버드나무가 꽃가루가 날린다고 민원을 제기하는데 강과 인간을 살리기 위해서 며칠간 인내해주는 미덕이 있었으면 좋겠다. 시적암에도 버드나무 묘목장을 만들어 하천과 영산강에 심을 계획이다.”

―이곳에 온 지 7~8개월밖에 안 되었는데, 고요하던 암자에 어떻게 많은 사람이 모여드는가.

“광주전남불교환경연대 대표를 8년간 할 때와 문빈정사·신흥사에서 맺은 인연들이 찾아온다. 사람을 길러내는 게 중요하기 때문에 매월 셋째·넷째 주 토요일 3개월 과정의 기초 교리 강좌를 한다. 1기에 12명이 들었고, 현재 2기에 14명이 함께하고 있다. 이들에게 불교적 삶은 어떤 것인지, 왜 관념에 안주하지 않고 사회참여를 해야 하는지 깨닫고 행동하게 한다. 폐비닐 수거 작업도 이들과 함께 한다. 봄이 되면 암자 텃밭에 농사를 짓고, 고사리와 머위, 취나물, 두릅을 따 무치고, 화전도 부쳐 산중 먹거리 축제를 벌일 계획이다. 그래서 아이들한테 이 좋은 먹거리를 지키기 위해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게 할 생각이다. 지역에서도 의미 있는 단체를 후원하고 뜻있는 일을 함께하기 위해 화순 읍내 진보정당과 농민회 후원의 밤에 일부러 찾아갔더니, 승복 입은 승려가 찾아온 것을 보고 깜짝 놀라더라.”

―원래부터 이렇게 대중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성격이었나.

“그렇지 않았다. 40~50대에 완도 신흥사 주지를 16년간 할 때 다실을 마련해놓고 상담하러 오라고 해도 찾아오는 신자가 없었다. 부부 문제, 자식 문제 등이 많은데도 왜 오지 않을까 생각해보니, 내가 너무 교만해 보여 자기 가정사를 이야기할 만큼 편하지 않았던 거다. 20대 초반부터 절집에서 주요 자리를 맡아 자가용을 끌고 다니니 어깨에 힘이 들어간 것이다. 무림의 고수는 원래 평범한 법인데, 허세를 부리는 이들이 큰 칼을 차고 뽐내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반성하고, 어깨에 힘을 빼려고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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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좌(제자)들에게도 존댓말을 쓰며, 불자들에게도 평등하게 대하려는 이유가 있는가.

“절집에 들어가 행자나 상좌들을 노예처럼 부리는 것도 반불교적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설사 절집에서 사제지간이라 하더라도 누구나 출격 장부로 각자 수행의 길을 가는 수행자로 여겨 존중해줘야 한다고 보았다. 불자 대중에게도 마찬가지다. 힘 있는 사람보다 힘없고 고통받는 이를 평등하게 대하는 것이 불교다.”

―그간 생각의 차이로 은사인 지선 스님과도 소원하게 지냈는데, 최근 조계종 중앙종회가 백양사의 총림을 해제해 지선 스님이 방장에서 물러나게 된 일을 어떻게 보는가.

“조계종 중앙종회는 백양사 주지가 산내에서 소통이 안 된다는 것을 이유로 들었는데, 그런 문제라면 어제오늘 일이 아니기에 핑계라고 본다. 큰 사찰을 가진 이들이 자기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목전의 이익에 따라 야합해 백양사 총림을 해제했다고 본다. 방장은 수행의 상징인데 투표로 막가파식 결정을 한다는 게 말이 안 된다. 조계종 권력을 몇 사람만 독차지해 종단을 농단하는 것을 보면 희망이 안 보인다. 그러나 4대강 순례 때도 지역 사찰들을 가보면 열악한 현실에서도 애쓰며 잘 살고 있는 스님이 많더라. 중앙이 아니라 그런 지역 현장의 스님들에게 희망이 있다.”

―불교환경연대 대표를 그만둔 것도 자승 스님을 비롯한 종단 권력의 핍박 때문이었나.

“자승 스님에게 총무원장 직선제를 하라는 대중의 요구를 받아들이라는 기자회견을 한 뒤부터 핍박이 시작되었다. 2017년도 컨테이너에 있던 불교환경연대 사무실을 마련하려고 릴레이 기도를 할 때였다. 조계사 주차장 터에 있던 컨테이너 사무실에서 절을 하는데, 조계사 직원들이 안전문제를 들며 이마저 하지 말라고 했다. 서울살이를 하며 거처할 방 한 칸이 없어 여주 신륵사에 방을 빌려 쓰면서 서울까지 오갔는데, 자승 스님과 가까운 이가 주지로 오면서 방을 빼도록 해 거처할 곳마저 없어졌다. 특히 자승 스님이 쥐락펴락하는 대찰들에서 불교환경연대의 후원을 끊거나 줄여 ‘아, 내가 있으면 불교환경연대가 힘들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현실 참여의 계기가 있었나.

“불심이 깊은 어머니의 손을 잡고 16살에 출가했다. 어머니는 6개월간 전남 장성 백양사에서 공양주를 하면서 내가 절에 적응하는 것을 보고 하산했다. 은사인 지선 스님을 따라 백양사와 영광 불갑사, 제주 관음사에서 소임을 맡다가 해인사 강원과 백양사 강원을 거쳐 1986년 중앙승가대에 입학했는데, 당시 승가대가 고려대 옆 개운사에 있어서 격변기를 지켜봤다. 이런 시대 상황에서 승려와 불교의 역할은 무엇인지 고민하며 승복을 입고 거리시위에도 참여하고, 봉은사에서 열린 노태우 대통령 취임축하 법회 반대에 나섰다가 성동구치소에서 3개월간 옥살이도 했다. 승가대 졸업 후 무등산 문빈정사 주지로 8년간 있으면서 광주 시민운동가들과 함께했다. 완도 신흥사 주지를 할 때는 공무원노조와 함께하면서 군청 간부들이 절에 안 나오고 개종까지 하는 것을 보며 고통스러워한 적도 있다.”

―사회참여를 하기까지 어떤 분들의 영향을 받았는가.

“어려서 출가해 은사(지선) 스님이 사생활이 없는 공적인 삶에 전념하고, 정의를 위해 투신하는 것을 보고 영향을 받았다. 또 수경 스님을 보고 불교 운동은 저렇게 하는 거라는 것을 알았다. 불교 세가 약한 광주·전남에서 대학생불자연합회 출신 불자들이 불교환경연대를 만들어 의욕적으로 운동해 지역 환경운동의 모범 사례가 된 것도 수경 스님에게 자극을 받아서다. 내가 불교환경연대 대표를 맡을 때도 수경 스님의 권유가 있어서였다. 또 환경문제뿐 아니라 남북문제 등 여러 사회문제에 앞장서 대중을 깨우는 법륜 스님을 보며 늘 배운다.”

화순(전남)/ 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겸 논설위원 cho@hani.co.kr

법일스님이 오지암자로 들어간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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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적암은 법일 스님의 사제인 법장 스님이 지어 20년을 은거한 곳이다. 그는 낮엔 농사를 짓고 밤엔 책을 읽거나 글을 쓰며 전기도 핸드폰도 없던 산골 오지에 홀로 살다가 입적했다.

법일 스님이 시적암에 들어온 것은 그런 도반의 삶을 동경해서만은 아니다. 암자에 쓸 물건도 일체 돈을 주고 사는 것을 금지하고, 쓰다만 헌것만 기증받아 사용하면서 법장 스님처럼 소욕지족의 가난한 삶은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은둔하지는 않는다. 그가 온 이래 암자에 사람들의 발길이 잦다. 시적암 가는 길에 만난 임정옥(52)씨는 “저렇게 ‘스님인체’하지않고 스스럼없이 허물 없이 어울리는 스님은 처음”이라며 “스님이 온지 몇 달만에 암자가 광주·전남 환경·시민운동의 구심점이 되어가는듯하다”고 말했다.

법일 스님은 자세를 낮추고 마을 사람들 속으로, 화순군의 단체들 속으로 스며들고 있다. 출가한지 40년이 넘은 승려가 거처할 방한칸을 얻을 수 없을만큼 인심 사나운 ‘모진 환경’에 내몰린 그지만, 시적암에서 그가 만들어가는 인심은 풍성하다. 그는 8년간 광주불교환경연대 대표로 활동할 당시 함께 한 회원 등과 함께 시적암의 텃밭을 가꾸어 채소를 나눈다. 또 시골의 폐비들을 수거하며 강과 들 살리기에 나서고 있다. 탐욕을 그치고, 자타불이의 깨달음이 실현되어야할 곳이 오지 암자만은 아닌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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