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1.27 (수)

이슈 우리들의 문화재 이야기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김수로왕은 동생"…장난감 방울에 그린 대가야 신화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경향신문

2019년 3월 고령 지산동 고분군의 4~5세 어린아이 무덤에서 발견된 토제방울. 직경 5㎝도 채 안되는 방울에 심상치않은 그림들이 새겨져 있었다. 발굴단(대동문화재연구원)의 배성혁 조사연구실장은 가야국 신화를 6컷으로 형상화한 것으로 풀이했다.|배성혁씨 논문에서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필자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는 ‘가야본성-칼과 현’ 특별전을 세 번 보았다. 한번은 허황후의 도래 신화를 담은 ‘파사석탑’을 중심으로, 또 한 번은 전체적인 전시구성을 중심으로 둘러보았다. 그런데 두 번 관람에도 뭔가 그냥 스치고 지나간 듯한 유물 한 점이 계속 눈에 밟혔다. 결국 세번째로 박물관을 찾아 그 유물을 제대로 뜯어보았다. 그 유물이 지난해 3월 경북 고령 지산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토제방울’이었다.

■견강부회인가

이번 특별전이 가야를 주제로 2700여 점의 유물이 총출동한 전시회가 아닌가. 어쩌면 직경 5㎝ 정도인 이 토제방울은 ‘가야본성’ 특별전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특별전에서는 전시장 한편 구석에 다음과 같은 유물설명과 함께 ‘초라한 모습’(필자의 눈에는)으로 소개되고 있었다.

‘이 방울에는 거북, 관을 쓴 남자, 하늘에서 내려오는 급합 등으로 추정되는 그림이 있어 화제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추상적으로 그려진 그림이라 보는 이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지난해 3월 이 유물이 출토되었을 때 대다수 언론은 ‘거북아 거북아…5세기 어린이 무덤서 대가야 버전 가락국 신화 그린 방울 출토’(필자)라는 등의 제목으로 제법 비중있는 기사를 썼다. 필자는 일단 발굴조사단의 해석을 존중하는 편이어서 되도록 긍정적인 입장에서 조사단(대동문화재연구원)의 견해를 다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회의감이 가시지 않았다. 왜냐면 국립중앙박물관의 유물설명처럼 토제방울에 새겨진 그림은 보는 사람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견강부회라는 이야기도 나왔다. 문재인 대통령이 ‘가야사 연구에 너무 소홀했다’는 요지의 발언을 한 이후 전국적으로 가야붐이 일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어린이 무덤에서 나온 그 작은 유물을 두고 ‘억지춘향’ 격으로 짜맞춘 것은 아닐까. 이런저런 이유로 필자는 놓치기 쉬운 그 작은 방울을 찾아낸 조사단의 성과에 박수를 보내고, 조사단의 해석을 제법 긍정적으로 소개했지만 ‘방울에 나타난 대가야 버전의 가락국 신화’와 관련해서는 판단을 유보했다..

경향신문

방울그림의 첫번째 주제. <삼국유사> 가락국 신화의 무대인 구지봉을 형상화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대가야 버전으로 해석될 경우 대가야 정견모주 설화의 무대로 전해지는 가야산 상아덤을 상징한 것일 수도 있다.|배성혁씨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어린이 무덤에서 출토된 방울그림

그후 1년 가까이 지난 지금, ‘가야본성’ 전시장 구석에 전시된 ‘토제방울’을 보고 불현듯 현재의 연구성과가 궁금해졌다. 해서 발굴조사 때 책임조사원을 맡은 배성혁 대동문화재연구원 조사연구실장에게 연락했더니 ‘마침 가야고분군 등재추진단이 펴낸 연구총서(<가야고분군 Ⅴ>)에 논문을 발표했노라’고 화답했다.

그래 배실장이 보낸 논문(‘고령 지산동 고분군과 대가야의 건국신화’)을 훑어보았더니 제법 논리를 갖춘 흥미로운 글이었다. 지금부터 배성혁씨의 논문을 토대로 ‘또 하나의 신화, 대가야 건국’ 이야기를 풀어본다. 독자 여러분의 판단을 기대해본다.

경향신문

그림에 등장하는 ‘관을 쓴 남자’는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등장하는 토착세력의 지도자(수장)를 형상화 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배성혁씨는 ‘남자의 머리 윗부분에 새겨진 세 가닥의 선각’을 주목한다. 이것은 대가야 고분에서 출토되는 금동관이나 관모의 장식품 등이 모두 세가닥을 기준으로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세 가닥의 관을 쓴 이는 바로 이 지역 지도자라는 것이다. |배성혁씨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2019년 3월 어느 날 고령 지산동 고분(사적 제79호)의 탐방로 조성을 위한 사전발굴조사에서 어린이 무덤이 확인됐다. 길이 1.65m, 너비 0.45m 정도의 작은 무덤에서 4~5살 어린아이의 치아 및 두개골 편이 출토되었다. 출토유물 중에 눈에 띈 것은 흙으로 구워 단단해진 방울이었다. 직경 5㎝ 정도되는 아주 작은 방울이었다. 5세기 후반 유물로 판단됐다. 발굴단은 무덤 주인공인 어린이가 생전에 갖고 놀던 장난감 정도로 여겼다. 그런데 이 방울을 세척하자 재미있는 그림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맨처음 보인 것이 거북이 그림이었다. 심상치않은 그림이라 여긴 발굴단은 현미경을 들이댔다. 그랬더니 방울 표면에서 6개의 그림이 연속으로 새겨져 있었다.

경향신문

방울에 새겨진 춤추는 사람. 하늘의 명에 따라 노래(구지가)를 부르며 춤을 추는 형상을 그렸다는 것이다.|배성혁씨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삼국유사> ‘가락국신화’

발굴 1년이 지난 지금 배성혁 실장의 정리된 논문은 이 그림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을까. 배실장은 “보는 관점에 따라 이견이 있을 수 있다”고 전제했지만 “그림 내용은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가락국 건국신화’를 표현하고 있음은 분명하다”고 했다. <삼국유사> ‘가락국신화’는 “기원후 43년 구지봉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지역을 다스리던 지도자 9명(9간·九干)이 200~300명을 이끌고 갔더니 모습은 보이지 않고 하늘에서 말소리만 들렸다”는 것으로 시작된다.

“‘하늘의 명에 따라 이곳에 나라를 세우려고 왔으니, 너희는…’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 놓아라. 내놓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라’하면서 춤을 추어라.”

무엇에 홀린 듯 9간을 비롯한 백성들이 그 말대로 노래하며 춤춘 뒤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그러자 하늘에서 자주색 줄이 늘어져 땅에까지 닿았다. 그곳에 가보니 붉은 보자기에 싼 금합(황금으로 만든 그릇)이 놓여 있었다. ‘가락국 신화’는 다음과 같이 끝난다.

“그릇을 열어보니 알 여섯 개가 있는데 태양처럼 빛났다.…알 6개가 모두 남자로 변했다…그 중 용처럼 생긴 이는 수로라 했는데 가야국을 세웠고, 나머지 5명도 5가야의 임금이 됐다.”

경향신문

춤추는 인물은 여인으로 보인다는 게 배성혁씨의 주장이다. 그림 한가운데 선시시대 암각화에서 흔히 보이는 여성 성기의 마크가 표현된 것을 주목했다. |배성혁씨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방울 그림의 해석

논문은 이 신화를 염두에 두고 방울그림을 해석했다.

먼저 ‘거북 머리’ 형상(제1주제)은 어떨까. 가락국 신화의 성소인 구지봉이 연상된다는 것이다. 봉우리 모양이 거북이 엎드린 형상이어서 구지봉이라 하지 않던가. 전문가 중에는 거북을 신과 인간의 매개동물로 보고, 거북의 ‘머리’를 수로(首露), 혹은 우두머리, 혹은 남근(男根) 등으로 해석하는 이들이 있다.

방울의 고리부분을 머리로 삼고 표면에 둥글게 외곽선을 그은 뒤 내부에 2열의 등껍질을 새겨넣은 형상(제2주제)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거북 그림은 ‘가락국기’의 ‘구지가(龜旨歌)’일 것으로 판단했다.

그럼 그림의 제3주제인 ‘관을 쓴 남자’는 어떻게 설명되나. ‘가락국기’에 등장하는 토착세력의 지도자(수장)를 형상화 한 것으로 평가했다. 논문은 머리 부분의 윗부분에 새겨진 세 가닥의 선각을 주목한다. 즉 대가야 고분에서 출토되는 금동관이나 관모의 장식품 등이 모두 세가닥을 기준으로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세 가닥의 관을 쓴 이는 바로 이 지역 지도자라는 것이다.

경향신문

히늘에서 내려오는 금합 자루를 엎드려 맞이하는 사람을 형상화한 그림. 이 그림은 말과 같은 짐승으로도 볼 수 있어 가장 이견이 많은 부분이다.|배성혁씨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4번째 그림은 ‘하늘의 명에 따라 노래(구지가)를 부르며 춤을 추는 여인’이라 평가한다. 왜 여인일까. 그림 한가운데 선사시대 암각화에서 흔히 보이는 여성 성기의 마크가 표현된 것을 주목했다. 오른손은 긴 소매가 앞으로 꺾어지며 휘날리고, 왼손은 뒤로 돌아가는 모양으로 짧게 표현했다.

5번째 그림은 어떻게 해석될까. 논문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금합을 담은 보자기’를 엎드려서 우러러 맞이하는 인물을 형상화한 것으로 보았다. ‘가락국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우러러 쳐다보니…”라는 표현과 연결된다.

경향신문

하늘에서 내려오는 금합 보자기를 형상화한 모습. 배성혁씨는 거북머리에 해당되는 고리를 통과해서 내려오는 두 줄과, 그 줄 끝에 달린 금합을 담은 자루(보자기)가 보인다고 해석했다.|배성혁씨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논문은 마지막인 6번째 그림의 주제를 ‘하늘에서 내려오는 금합을 담은 자루’로 판단한다. 두번째 그림의 거북 그림에서 보듯 방울의 고리 부분은 하늘(天)과 신(神)을 상징하는 거북머리에 해당된다. 그런데 6번째 그림을 보면 역시 거북머리에 해당되는 고리를 통과해서 내려오는 두 줄과, 그 줄 끝에 달린 금합을 담은 자루(보자기)가 보인다는 것이다. 논문은 이것이 ‘가락국 신화’의 하이라이트와 부합된다고 보았다.

“자줏빛 줄이 하늘에서 드리워져서 땅에 닿았다. 그 줄이 내려온 곳을 따라가 붉은 보자기(자루)에 싸인 금합(金合)을 발견하고 열어보니 해처럼 둥근 황금 알 여섯 개가 있었다”는 대목이다.

경향신문

5세기 후반에 조성된 4~5살 어린이 무덤에서 확인된 여러 유물들. |배성혁씨 제공


■일연스님은 왜?

한마디로 ‘대가야의 중심지’인 경북 고령의 어린이 무덤에서 출토된 방울 그림은 ‘가락국 신화’를 6컷으로 그린 삽화라는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흥미로운 시사점이 있다.

“6개의 알은 어린아이로 변했는데, 얼굴은 용처럼 생겼고, 요순과 상 탕왕, 한나라 고조 유방 등(역대 성군들)을 빼닮은 이가 왕위에 올랐으니 바로 대가락국(가야국) 임금인 수로왕이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각 가서 5가야의 임금이 되니….”(<삼국유사> ‘가락국기’)

인용문에서 보듯 <삼국유사> ‘가락국기’는 기본적으로 김수로왕의 금관가야 건국신화를 중심으로 다뤘다. 나머지 5가야는 ‘이하동문’으로 처리한 인상이 짙다. 왜 그랬을까. 여기서 <삼국유사> ‘가락국기’를 편찬한 일연 스님(1206~1289)이 ‘가락국기’를 쓰면서 달아놓은 각주를 살펴보자.

“문종의 대강 연간(1075~1084)에 금관지주사(김해부사) 문인(文人)이 지은 ‘가락국기’를 줄여 싣는다.”

무슨 말일까.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 ‘가락국기’ 편찬하면서 기존 ‘문인’이라는 인물이 쓴 ‘가락국기’ 전체를 수록하지 않고 ‘요약해서’ 실었다는 것이다. 그랬으므로 일연 스님이 ‘김수로왕의 금관가야’ 신화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은 ‘5가야의 건국 이야기’를 생략한 것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경향신문

방울이 발굴된 고령 지산동 고분군의 어린이 무덤. 머지않은 곳에 상아덤이 있는 가야산이 보인다. |배성혁씨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가락국신화의 대가야 버전?

그렇다면 금관가야의 중심지(김해)가 아닌 대가야의 중심지(고령)에서 현현한 방울그림은 ‘가야 건국 신화의 대가야 버전’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배성혁씨의 논문은 한술 더뜬다.

이 ‘대가야 버전’이 두 단계로 발전 전승했다는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조선 중기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통일신라시대의 대학자인 최치원(857~?)의 <석이정전>을 인용해서 <삼국유사> ‘가락국기’는 다른 ‘대가야 신화’를 소개한다.

“가야산신인 정견모주가 천신 이비가와 사랑을 나눠 대가야왕(뇌질주일)과 금관국의 왕(뇌질청예) 등을 낳았다.”

최치원의 <석이정전>과 일연스님의 <삼국유사> ‘가락국기’가 다른 점이 몇가지 있다. 즉 <삼국유사>의 구지봉(김해)이 <석이정전>에서는 가야산으로 바뀐다. 또 <삼국유사>의 ‘수로왕과 다섯임금’은 <석이정전>에서는 두 형제, 즉 ‘대가야왕 뇌질주일(이진아시왕의 별칭)과 금관국왕 뇌질청예(수로왕의 별칭)’으로 변한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배성혁씨의 논문은 출토된 방울 그림의 전체적인 컨셉트로 보아 5세기 무렵까지는 <삼국유사> ‘가락국기’와 비슷한 건국신화가 전승되었을 것으로 보았다. 즉 시조가 알에서 태어난 건국신화의 내용은 금관가야 뿐 아니라 대가야 등 모든 가야의 공통된 ‘난생설화’로 전해졌다는 것이다.

그러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남정(기원후 400년) 이후 금관가야가 쇠퇴하고 경북 고령 중심의 대가야가 가야연맹의 맹주로 등장한다. 이렇게 가야연맹의 최대 세력으로 부상한 대가야가 그 위상을 과시하려고 ‘가락국 신화를 대가야 버전’으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5세기 후엽 제작된 토제방울의 출토의미라는 것이다.

경향신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가야본성-칼과 현’전에 출품된 방울. ‘보는 이에 따라 이견이 있을 수 있다’는 내용의 설명과 함께 전시되고 있다.


■대가야가 형, 금관가야가 동생

노중국 계명대 명예교수는 이와 관련해서 “(새로운 ‘대가야 버전’의 신화는) 고령 대가야(가라국) 중심의 인식에서 새롭게 정리되어 전승됐다”고 보았다. 고령의 대가야는 최고지배자의 칭호를 종래 ‘한기’에서 ‘왕’으로 개칭했다. 중국 양나라 시대(502~557)에 편찬한 <남제서>는 “479년 가라국왕 하지(荷知)가 남제에 사신을 보냈다”고 했다. 남제(479~502)는 이때 가라국왕에게 ‘보국장군본국왕(輔國將軍本國王)’의 작호를 내렸다. 가라국이 남제와의 교섭을 통해 대외교역권을 장악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위상강화에 걸맞은 건국신화는 대가야 중심으로 바뀐다. 즉 대가야왕(뇌질주일·이진아시왕)이 형으로, 금관가야왕(뇌질청예·김수로왕)이 동생으로 표현된다는 것이다. 대가야가 가야 연맹의 정통성을 계승한다는 뜻이라는 얘기다.

또한 새로운 버전의 가야신화는 가야 시조의 성(姓)을 김수로왕의 ‘김’씨가 아니라 ‘뇌질’씨로 바꾼다. 이것은 대가야 시조의 성씨는 ‘뇌질’이며, 대가야가 가야연맹체의 맹주가 되자 금관가야의 시조인 김수로왕의 성까지 ‘뇌질’로 둔갑시킨 것이다. 대가야가 금관가야를 지파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경향신문

토제방울 속에는 작은 구슬에 들어있었다. 배성혁씨는 “방울을 만든 대가야 장인은 방울외형을 금합에 비유하고 그 속에 넣은 작은 구슬은 가락국기의 6개의 알 중 하나로 대가야의 시조를 상징하기 위해 만들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배성혁씨 논문에서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김해 구지봉과 가야산 상아덤

그런 의미에서 배성혁씨의 논문은 5세기 후엽의 토제방울 그림을 좀 달리 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즉 토제방울 그림의 첫번째 주제인 ‘거북 머리’ 형상이 김해 구지봉이 아닌 고령 인근의 가야산 정상에 우뚝 서있는 ‘상아덤’(해발 1220m)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삼국유사>의 가야신화 무대가 금관가야의 중심지(김해 구지봉)에서 가야산 상아덤(고령)으로 바뀐 것이다.

논문이 주목한 가야 상아덤은 남성 성기처럼 우뚝 솟은 바위로 유명하다. 이 상아덤이 바로 가야산신과 천신이 사랑을 나눠 대가야와 금관가야 형제 창업주를 낳았다는 성소이다. 논문은 토제방울에 등장하는 거북 목 혹은 남성 성기의 형상이 바로 상아덤을 표현한 것이라고 본다.

■부담스러운 소개지만…

사실 필자는 한 연구자의 논문을 이렇게 길게 소개하는 것이 적이 부담스러웠다. 토제방울의 그림 중 단 한 컷이라도 다른 해석이 나온다면 전체 스토리가 얼크러지기 때문이다. 특히 그림 중 5번째 주제는 배성혁씨의 논문도 언급하지만 가장 이견이 많은 그림이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금합을 맞이하려고 하늘을 우러러 보는 인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그저 말과 같은 짐승으로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요즘 대통령의 언급 한마디에 영남지역은 물론이고 전라도 지역까지도 ‘가야 가야’ 하는 것도 보기좋은 모양새는 아니다. 신라나 백제의 유물과 유적이 확실한 것 같은데 ‘가야붐’ 때문에 너도나도 ‘가야!’라고 한다면 그 또한 중대한 역사왜곡이니까…. 1960~70년대 박정희 정권 때 일어난 ‘신라붐’과 1990년대 이후 중국의 동북공정 때 불어닥친 ‘고구려붐’이 불현듯 떠올랐다.

■역사고고학에서는 ‘맞다’ ‘틀리다’는 없다

하지만 용기를 내어 이 논문을 소개하는 것은 두가지다. 실토하자면 토제방울 그림 자체가 매우 재미있다는 것도 작용했다. 순전히 기자적인 압장에서…. 이것이 ‘대가야 신화’가 아니고, 어린이 무덤에서 나온 시쳇말로 ‘어린애 장난감’이라도 재미있지 않은가. 직경 5㎝ 될까 말까 한 그 작은 방울에 동화 속 삽화 같은 그림을 그렸고, 그것을 가지고 놀던 1500년 전 아이를 생각해보라.

다른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고고학이나 역사 분야에서 가장 꼴보기 싫은 이들은 바로 ‘맞다’와 ‘틀리다’를 함부로 재단하는 연구자들이다. 그들이 2000년 전, 1000년 전, 500년 전을 살아보았던가. 다른 이의 연구결과를 ‘틀렸다’ ‘맞다’고 평가를 내리는 어줍지않은 자세는 꼴불견이다. 역사·고고학에서는 ‘맞다’ ‘틀리다’가 존재할 수 없다. 역사·고고학 연구자들은 그저 옛 자료를 토대로 합리적으로 추정하고 주장할 뿐이다. 그것이 깎고 담금질 하는 과정에서 상당수는 사장되지만, 일부는 살아남아 통설이 되고, 정설이 되고, 사실이 되고, 결국 진실로 굳어지는 것이다.

필자가 보기엔 이 논문이 나름 논리적으로 정리되어 있다는 판단이 들었다. 만약 이 논문의 해석이 맞다면 1년전 현현한 토제방울은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없는 ‘새로운 가야 신화’의 증거일 수 있다.

혹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인용된 최치원의 <석이정전>이 소개한 ‘가락국 신화의 대가야 버전’을 입증하는 자료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어떤 연구자라도 반론이 있다면 논문을 통해 논쟁하기를 바란다.

<참고자료>

배성혁, ‘고령 지산동 고분군과 대가야의 건국신화’, <가야고분군 Ⅴ-가야고분군 연구총서> 6권, 가야고분군 세계유산등재추진단, 2020

노중국. ‘대가야의 국가발전과정’, <쟁점 대가야사-대가야의 국가발전단계>, 대가야박물관·대동문화재연구원, 2017

경향신문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 장도리 | 그림마당 보기

▶ 지금 많이 보는 기사

▶ 댓글 많은 기사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