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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0 (금)

고급과 B급을 넘나드는 신사들의 전쟁, 영화 ‘젠틀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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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록 홈즈’ ‘알라딘’ 가이 리치 감독

마리화나 농장 둘러싼 예측불허 전개

연극적인 대사로 품격은 더하고

스트리트 힙합 등 B급 재미 녹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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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시작하면 한 사내가 누군가와 전화 통화를 한다. 영화의 주인공 미키 피어슨(매슈 매코너헤이)이다. 갑자기 그의 뒤에서 괴한이 나타나 총을 겨눈다. 총소리가 울리고 피가 튀는가 싶더니 장면이 급박하게 바뀐다. 시작부터 주인공의 죽음을 보여주는 건가? 관객의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26일 개봉하는 영화 <젠틀맨>은 가이 리치 감독의 신작으로 관심을 모은다. 영국 출신의 가이 리치는 지난해 디즈니 실사판 <알라딘>으로 흥행 신화를 일궜다. 전세계 10억달러(약 1조2천억원) 넘는 수익을 올렸고, 국내에서도 천만 관객을 돌파했다. 그 이전엔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주연의 <셜록 홈즈> 시리즈로 이름을 떨쳤다. 표면적으론 매끈한 대작이 눈에 띄지만, 그의 장기는 범죄물 장르의 초기작에서 제대로 빛을 발한다. 첫 장편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1998)와 차기작 <스내치>(2000)는 캐릭터의 조화, 감각적인 영상과 편집, 허를 찌르는 전개 등으로 당시 영화계에 파란을 일으켰다. <저수지의 개들> <펄프 픽션>의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과 <트레인스포팅>의 대니 보일 감독을 잇는 또 다른 신성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젠틀맨>은 바로 그 시절의 가이 리치로 돌아간 듯한 느낌의 갱스터 범죄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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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초반의 총격 장면 이후 사설탐정 플레처(휴 그랜트)가 미키 피어슨의 오른팔인 부하 레이먼드(찰리 허넘)를 찾아가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플레처는 자신이 쓴 시나리오라며 미키 피어슨에 대해 조사한 내용을 레이먼드에게 들려준다. 그리고 그 시나리오를 거액을 주고 사라고 협박한다. 관객은 액자식 구성으로 펼쳐지는 플레처의 이야기를 통해 어떤 일이 있었는지 파악하게 된다.

그 이야기는 이렇다. 미키 피어슨은 영국에 거대한 마리화나 제국을 건설한 범죄 조직의 보스다. 그는 이제 은퇴하고 사랑하는 아내 로잘린드(미셸 도커리)와 편안한 여생을 보내려 한다. 이를 위해 미국 억만장자 매슈(제러미 스트롱)에게 마리화나 농장을 팔려고 흥정을 시작하지만, 예상치 못한 인물들이 얽히고설키면서 계획이 틀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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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시작 후 30분 동안 플레처의 입을 통해 여러 인물과 사건이 한꺼번에 우르르 쏟아지는 탓에 이야기의 전체 구조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더군다나 플레처가 충분히 조사하지 못한 대목에 상상과 허풍을 더하는 바람에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부터가 허구인지 헛갈린다. 이 초반 30분의 고비를 집중해서 잘 넘겨야 한다. 머릿속에서 퍼즐을 맞추듯 인물과 사건을 하나하나 엮어가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아귀가 딱딱 들어맞으며 전체 그림이 드러나는데, 이때의 쾌감이 상당하다. 이후부터 이야기에 가속도가 붙으면서 숨 돌릴 틈 없이 빠져들게 된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어느 하나 소모되지 않고 이야기에 풍성한 살을 붙인다. 미키 피어슨에게 앙심을 품은 신문사 편집장(에디 마산)과 그의 사주를 받은 사설탐정 플레처, 정글의 왕 자리를 노리며 호시탐탐 미키 피어슨을 깔아뭉갤 기회만 보는 중국 범죄조직 삼합회의 중간 보스 드라이 아이(헨리 골딩), 본의 아니게 사건에 얽힌 이종격투기 코치(콜린 패럴) 등이 모두 제구실을 해낸다. 특히 찌질하고 비열하지만 미워할 수만은 없는 플레처 역을 맡은 휴 그랜트의 연기 변신이 돋보인다. 우리가 아는 로맨틱 코미디 속 신사 이미지는 찾아볼 수 없다.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에서 다정다감한 주인공으로 일약 스타가 된 말레이시아 출신 헨리 골딩의 악역 변신도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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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스터 범죄 영화이지만 피가 튀는 폭력 장면은 많지 않다. 대신 화려한 언변의 대사가 중심이 된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연상시키는 연극적인 대사가 품격을 더하는 한편, 스트리트 힙합 문화까지 껴안은 비(B)급 감성이 절묘한 재미를 준다. 영국 귀족을 상징하는 <젠틀맨>이라는 제목 아래 ‘젠틀맨’이 되고자 하나 결코 그럴 수 없는 이들의 역설이 담겼다. 씁쓸한 뒷맛보다는 짜릿한 쾌감에 더 힘을 준 역설이다.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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