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전 대통령이 발령한 긴급조치 1호의 최초 위반자로 옥고를 치른 고 장준하 선생의 유족에게 국가가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1심 법원의 판결이 나왔다. 재판부는 박 전 대통령의 긴급조치 발령행위 자체가 위법하므로 국가가 피해자들에게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대통령의 긴급조치권 행사는 ‘고도의 정치적 행위’이므로 국민 개개인에 대해 민사상 불법행위를 구성하지 않는다고 한 양승태 대법원 판결과 배치된다.
13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민사20부(재판장 김형석)는 장 선생의 유족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최근 유족 승소 판결을 내렸다. 국가가 유족에게 총 7억8000여만원을 지급하라는 취지다.
박정희 정권 시절인 1973년 장 선생은 재야인사·종교인·지식인·청년학생 등을 접촉해 반민주적인 유신헌법을 개정하기 위한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 등을 벌였다. 그러다 이듬해 긴급조치 1호를 위반한 혐의로 기소됐고 법원에서 징역 15년과 자격정지 15년을 선고받았다. 장 선생은 이후 형 집행정지로 석방됐지만 1975년 경기 포천 약사봉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장 선생 유족이 재심을 청구해 2013년 무죄가 확정됐다. 유족은 국가의 불법행위로 입은 손해를 배상하라며 소송을 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재임 시절 대법원은 긴급조치가 위헌·무효라면서도 박 전 대통령의 긴급조치 발령행위 자체는 ‘고도의 정치적 행위’일 뿐 국민 개인에 대한 불법행위는 아니라고 했다. 헌재도 2018년 8월 양승태 대법원의 판결을 취소할 수 없다고 결정했다.
2013년 3월30일 고 장준하 선생을 추모하는 겨레장 발인제를 마친 운구행렬이 서울광장을 떠나 노제가 열리는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으로 향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
장 선생 유족 사건을 심리한 이번 재판부는 양승태 대법원 판결의 논리를 비판하면서 박 전 대통령의 긴급조치 1호 발령행위와 이에 근거한 수사·재판 및 징역형의 집행 모두 헌법에 반하는 위법행위라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대통령의 긴급조치 발령행위는 그 위반행위에 대한 수사, 재판, 형의 집행을 당연히 예정하고 있고 실제로 이에 이르러 피해가 구체적으로 발생한 경우에는 수사, 재판, 형의 집행과 분리해 발령행위 자체만을 판단해 정치적 책임만을 진다고 할 수 없다”고 했다. 재판부는 “발령행위는 헌법과 법령에 위반되나 정치적 책임만을 지고 그 개개의 수사, 재판, 형의 집행행위는 각각 공무원의 고의·과실이 인정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대통령이 당초부터 위헌·무효인 긴급조치를 고의·과실로 발령하고 이에 따라 실제로 피해가 발생한 경우에도 민사상 불법행위 책임은 아무도 지지 않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며 “이는 정의관념에 반한다”고 했다.
재판부는 이어 “대통령의 긴급조치 1호 발령행위는 대통령의 헌법수호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서 그 내용이 헌법의 문언에 명백히 위반되고, 국민의 기본권이 직접적이고 중대하게 침해된다는 사정을 잘 알면서도 행해진 것”이라며 “이로 인해 실제 피해를 입은 장 선생에 대해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에 의한 위법행위에 해당한다”고 했다. 이 재판부는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던 홍모씨 유족이 낸 국가배상 청구소송에서도 최근 같은 이유로 유족 승소 판결을 내렸다.
양승태 대법원의 긴급조치 판결에 배치되는 판결들은 계속 나오고 있다. 지난해 서울중앙지법에서만 4월 민사27부(재판장 임정엽), 9월 민사22부(재판장 이동연), 10월 민사16부(재판장 김동진) 등 3개 재판부에서 판결을 내놨다. 2016년에는 광주지법 민사13부(재판장 마은혁)와 서울중앙지법 민사11부(재판장 김기영)가 유사한 판결을 했다. ‘사법농단’ 사건으로 기소된 양 전 대법원장의 공소사실에는 대법원 판례에 반하는 긴급조치 판결을 선고한 김기영 당시 부장판사(현 헌법재판관)에 대해 징계를 검토한 혐의(직권남용)가 포함돼있다.
이혜리 기자 lh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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