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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9 (월)

[강천석 칼럼] 秋 법무, 침 쏘고 죽는 벌이 될 생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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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과 다수당, 정치 先例 짓밟는 건 헌법 파괴 다름없어

조선일보

강천석 논설고문


추미애 법무장관을 지켜보노라면 ‘독(毒)’ 자를 품은 한자 단어들이 줄지어 떠오른다. 맹독(猛毒)·혹독(酷毒)·표독(慓毒)…. ‘백바지에 난닝구’가 상표였던 노무현 시대의 스타 유시민씨 하면 경박(輕薄)·부박(浮薄)이란 말이 떠오르던 것과 대조적이다. 인성(人性) 차이를 반영하는 것이겠지만 모시는 지도자와 정권 성격도 크게 작용한 듯하다. 노무현 시대에는 ‘한 번 물리면 죽는다’는 공포감이 사회를 짓누르진 않았다. 문재인 시대는 공기 질(質)이 달라졌다.

일류 법률가와 삼류 법률가는 법률 속 '금지(禁止) 표현'을 해석하는 데 큰 차이가 있다. 삼류들은 '법률이 명시적으로 금지하지 않는 것은 뭐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독재자의 손발로는 이만큼 부리기 편리한 사람이 없다. 히틀러는 1939년 폴란드를 침공·점령한 뒤 한스 프랑크라는 변호사를 총독으로 임명했다. 오스트리아를 병합하면서 변호사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를 총독으로 기용했고, 그는 네덜란드 총독 시절 악명(惡名)을 떨쳤다. '폭정(暴政)'이란 책에 보면 나치 학살 부대인 친위대 고급 지휘관 가운데 법률가 출신이 유달리 많았다고 한다. 법률에 '유대인·집시·장애인을 학살해선 안 된다'는 금지 규정이 없으니 '해도 된다'는 게 그들 생각이었다.

추 법무장관은 요 며칠 사이 검찰총장에 대한 지휘권을 두 번이나 행사했다. 하나는 이 정권 탄생의 정치적 대모(代母)라는 한명숙 전 총리의 뇌물 사건 재조사와 관련된 것이다. 다른 하나는 교도소에 복역 중인 사기범이 범여권(汎與圈) 인사가 뇌물을 받은 정보를 주겠다며 어느 방송 기자를 유인(誘引)하고, 사기범이 이걸 다시 정권의 하수인 노릇을 하는 다른 방송에 역(逆)제보해 몰래 카메라로 녹화·녹음한 사건이다. 이런 저질(低質) 함정 수사에 지휘권 발동이란 큰 도끼를 들고 나온 이유는 이 사건에 휘말린 검찰총장과 가까운 검사 목을 베 그 수급(首級)을 들이밀어 총장 퇴진을 압박하려는 것이다. 울산 선거 불법 개입 사건 등에서 대통령을 밀착 경호하려는 충성심의 표시이기도 하다.

추 장관은 지휘권을 발동하면서 검찰청법 8조를 들고 나왔다. 이 조항은 '법무장관은 구체적 사건에 대해서는 검찰총장만을 지휘·감독한다'로 돼 있다. 일본 법률을 그대로 베낀 것이다. 이 조항의 입법 취지는 법무장관이 '검찰총장을 통해' 이 사건 저 사건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며 시시콜콜 나서라는 뜻이 아니다. 가급적 나서지 말라는 것이다.

추 장관이 모르는 게 또 있다. 장관의 지휘권은 벌침과 같다. 벌은 침을 쏠 수 있으나 침을 쏘면 침 맞은 상대가 아니라 벌이 죽어야 한다. 일본의 선례(先例)가 그걸 말해준다. 일본 경우 1954년 집권 자유당의 불법 정치자금에 대한 검찰 수사를 저지하기 위해 법무장관 이누카이 다케루(犬養健)가 지휘권을 발동했다. 법 제정 이래 최초이자 최후 사례다. 그는 지휘권을 발동한 후 장관을 사임하고 정치 자체를 접었다. 벌처럼 죽은 것이다.

일본 근무 시 이누카이의 아들과 식사를 한 적이 있다. 일본 언론사 최고 간부였다. 자리가 익어 지휘권 발동 이후 이야기를 묻자 그는 못 들은 척 말머리를 돌렸다. '아차' 하고 후회하며 집에 돌아와 인명(人名) 사전을 들췄더니 이누카이 큰딸의 후일담(後日談)이 나왔다. "아버지는 지휘권 발동을 할아버지(그도 유명한 총리였다) 자식으로서 자랑스럽지 못한 행동으로 평생 후회했고, 우리 가족 역시 오명(汚名) 속에 살았다."

민주 정치는 헌법과 법률만으론 지탱할 수 없다. 헌법과 법률 못지않게 관례(慣例)와 선례의 존중이 중요하다. 영국에선 왕이 하원 다수당의 대표를 총리로 임명한다. 영국 법 어디에도 '다수당 대표를 총리로 지명한다'는 조항이 없다. 법에 없다 해서 아무나 총리로 지명하는 순간 영국 민주 정치는 끝난다. 관례와 선례를 깔아뭉개는 것은 헌법과 법률 파괴와 맞먹는 중죄(重罪)다.

제1 야당 참여 없이 선거법을 멋대로 뜯어고치고, 국회 상임위원장을 의석 수에 따라 배분하는 선례를 뒤엎고, 대통령의 임명 권한을 내세워 대법관·헌법재판소 판사를 제 편 일색(一色)으로 도배하는 국가 운명은 사실상 헌법 파괴다. 법무장관이 지휘권 발동을 부엌칼 휘두르듯 해서는 사법체계가 견뎌낼 수 없다. 대통령과 다수당이 주어진 권한을 막장까지 밀고 나가면 유혈(流血)·무혈(無血) 정치 보복의 수레바퀴가 끝없이 돌아간다. 대통령과 집권당은 지금 그 바퀴를 돌리고 있다.

[강천석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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